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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

흩날리는 꽃나무 아래

그대가 서 있었다.

4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머물렀던 추위가 드디어 물러갔다. 낮이 되면 조금 덥다고 느낄 만큼 기온이 올라간 4월에 시라부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은 반드시 라이브로 봐야 된다며 따라오려는 부모님을 겨우 말린 시라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막내아들이었고, 늦둥이였다. 바로 위의 누나와 나이차이가 7살이 났고 큰 형과는 10살이나 차이가 났다. 덕분에 안 그래도 사랑이 넘쳐나는 가족들의 관심은 대단했고 그것이 귀찮다 못해 짜증나는 그였다. 봐라. 오늘도 입학식에 늦어 넓디넓은 교정에 덩그러니 남겨졌지 않은가. 어디에 어느 건물이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 하더라도 길치인 그에게 있어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차라리 이대로 집에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버스로 20분이나 걸려 도착한 것이 아까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학교를 탐방하자. 내일부터 시작될 학기에 길을 잃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길치라는 것을 알리는 것 보다 차라리 오늘 길을 잃어서라도 지리를 외우자. 길을 잃어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누군가를 붙잡고 물으면 그만일 터.

 

고개를 들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직선인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적회색을 띈 타일로 이루어진 5층짜리 건물이었다. 명문 고등학교답게 도서관이라는 건물이 따로 세워져 있는 건가? 작년까지 다녔던 학교의 도서관이라 하면 수업을 듣는 건물의 어딘가에 있었기에 이건 나름 새로운 충격이었다.

 

분명 저 건물에 들릴 일은 시험 기간뿐이니라. 시라부는 그리 생각하며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번에는 두 번의 우회전과 한 번의 좌회전 후에 도착한 곳이었다. 1학년 교사동. 그리 쓰여 있는 비석 뒤로는 3층짜리 건물이 우뚝이 세워져 있었다. 일(一)자 형태의 건물 앞에는 큰 벚나무와 함께 작은 잔디밭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몇 개의 벤치가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인데 마치 대학교와도 같은 모습에 도서관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명문 고등학교라 해도 이것 참.

 

2학년과 3학년 교사동은 얼마나 더 화려할까? 다음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마냥 괜한 기대를 품으며 건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건물도, 잔디밭 한 가운데에 우뚝이 솟은 벚나무도 아름다웠다. 마치 그려낸 듯한 풍경을 시라ㅣ부는 넋 놓고 바라봤다. 수명이 다해 떨어지는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해쳐나가며 걷던 시라부는 보았다.

 

한 남학생이었다.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자신보다 큰 키를 가진 남학생은 눈앞에 있는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자기처럼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위화감 때문인지 아니면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서인지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시라부는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위화감은 꽃잎으로 다가와 옷깃을 스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

 

 

 

"시라부."

 

무릎을 집고 섰다.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내고 싶은 고통을 집어 삼키며 고개를 숙여 숨을 골랐다.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땀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바라보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칠게 숨을 내뱉는 우시지마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네, 우시지마 선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직도 토스 타점이 높다."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시라부가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다. 입학식날 보았던 남학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동아리 홍보 기간이었다. 아침부터 방과 후 까지 시끄럽게 외쳐대는 이들의 권유 사이에서 그저 서 있던 그를 발견했다. 배구부원을 모집한다는 팸플릿을 들고 있는 그를 보고, 그 날 입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배구였다.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배구의 규칙에 대해 공부했다. 포지션에 대해 공부했다. 기술에 대해 공부했고, 공에 대해 공부했다. 공부하고, 공부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포지션을 알게 되었다. 윙 스파이커.

 

그래서 선택했다. 세터. 윙 스파이커를,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도울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있는 역할이었다. 지옥보다도 더한 연습을 버티고, 견뎌내고, 소화해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몸에 익혀 겨우 그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었건만 도울 수는 없었다. 너 노력하는 수밖에. 크게 숨을 삼키며 유니폼을 끌어 땀을 닦았다.

 

 

"다시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바닥에 놓여 있던 배구공을 집어 들었다.그런 시라부를 내려다봤다. 땀에 젖어 짙은 밀빛을 발하는 머리카락도, 거친 숨을 내뱉는 입술도, 그것보다 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을 바라봤다.

 

 

"아니, 오늘은 그만 하지. 늦었다."

 

 

시라부의 손에서 배구공을 뺏어 들었다. 아직 저녁 7시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9시쯤이 되어서야 시라부 쪽에서 늦었으니 그만 하자 했을 터였다. 그러면 아쉽다는 표정을 짓곤 하던 우시지마였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가 먼저 그만 하자 한다.

 

 

"전 더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못해서 그런 건가? 못하니까 그의 연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인가? 시라부는 괜히 불안해서 발끈했다. 아직 더 할 수 있었다. 아직 그의 옆에 서려면 한참이나 모자랐고, 모자랐기 때문에 연습해야했다. 그런 시라부를 알지 못하는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리고.."

 

 

공으로 시라부의 머리를 가볍게 친 그가 발걸음을 돌린다. 공을 모아놓은 바구니에 들고 있던 공을 넣었다. 그런 우시지마를 돌아보며 공이 닿았던 제 머리를 매만졌다.

 

 

"같이 가 줬으면 하는 데가 있다."

 

 

시라부만이 들었다. 그리 말하는 우시지마는 아직 남아 연습하고 있는 부원들에게 먼저 자보겠다 인사를 하고 체육관을 빠져 나갔다. 감독 또한 그런 우시지마를 힐끗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리 말을 한 것일까? 사토리!! 저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를 부르는 감독을 바라보다 시라부 또한 체육관을 빠져 나왔다.

 

체육관에서 50m 떨어져 있는 부실로 향했다. 부실 안 쪽에 위치한 샤워실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단 둘이 씻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을 그에게 보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다른 부원들과 함께라고 해도 겨우, 멀찌감치 떨어져서 씻는데 단 둘만은.

 

땀으로 인해 끈적거리는 몸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닦아냈다. 찝찝해도 부끄러워 죽는 것 보다는 낫겠지. 시라부는 벗은 져지를 쇼핑백에 우겨 넣곤 벗어 두었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다 씻은 것인지 우시지마가 샤워실에서 나온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무마시키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되는 것일까?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대답을 해 줄까? 중간에 끊기는 것이 더 어색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가방까지 어깨에 메고 부실을 나와버렸다.

 

두 사람은 걸었다.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체육관을 지나서, 배구부가 아닌 다른 운동부가 사용하는 체육관도 지나서 정문을 향해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체육동을 빠져나온 우시지마는 정문이 위치해 있는 왼쪽 길이 아니라 교사동이 모여 있는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우시지마 선배. 교문은 그쪽이 아니라..."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다 하지 않았나. 따라 와줬으면 좋겠다."

 

 

2년 하고도 조금의 날을 걸은 길을 설마 그가 잊을 리 없었다. 아무리 무신경한 그여도 이런 일상적인 것을 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에 시라부는 당황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이 길로 걸어가는 것이 맞다고 외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라부를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우시지마를 시라부가 따라간다. 그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듣는 자신이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할 수 있었다. 멈춰선 탓에 벌어진 간격을 단숨에 좁힌 시라부와 그런 시라부의 발자국 소리를 놓치지는 않을까 신경을 곤두 세운 우시지마가 도착한 곳은 1학년이 사용하는 교사였다.

 

1년 전, 입학식 날에 보았던 풍경이었다. 오히려 그때 보다 더 아름다웠다. 잔디의 둘레를 따라 설치된 전등이 한 가운데에 솟은 벚나무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벚나무를 한 번, 뒤에 서있는 시라부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본 우시지마가 잔디밭으로 들어간다.

 

 

"작년 입학식 날 난 여기에 서 있었다."

 

 

그 날과 같은 위치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우시지마가 말한다. 그런 우시지마를 시라부가 바라본다. 훨씬 더, 눈이 아릴 정도로 아름답다. 시라부는 생각했다.

 

 

"여기. 이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꽤나 오래전부터 계속 기다려왔지."

 

 

그와 동시에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기다렸단 말인가? 애초에 왜 이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인가? 시라부는 묻지 않고, 그저 우시지마를 바라봤다. 그런 시라부를 여전히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손을 뻗는다. 마치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내밀어진 손을 시선을 내려 바라봤다.

 

 

"시라부 켄지로. 좋아한다."

 

 

벚꽃이 흩날렸다. 바람을 타로 떨어지는 분홍색의 꽃잎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아마 소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여렸을 때, 동네에 위치했던 작은 공원에 심어져 있던 벚꽃 아래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을.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수명을 다해 떨어지는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던 풍경 속에 서서 자신을 향해 웃어 보였던 것을. 그것이 꽃잎과 함께 떨어져 제 옷깃에 닿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나도 굳이 말하지 않을 거야. 어린 날의 우리는 어린 날의 우리이고 고등학생의 우리는 고등학생의 우리니까. 지금은 고등학생의 우리를 이야기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 다 가는 꽃구경 나는 못가니까 너네라도 꽃비 맞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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