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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토끼 베이커리에

어서오세요!

말랑쀼

우시지마와 시라부의 나이 차이가 꽤 있으며, 시라부는 배구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 커플링이 살짝 섞여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캐해석이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캐붕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 어느 빵집 알바생의 고난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쿄의 어느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이름은 시라부 켄지로인데, 별로 궁금해하실 것 같지 않으니 넘어가죠. 어제까진 비가 왔는데, 오늘은 무지 맑네요. 날씨는 좋은데 제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동아리에 끌려갔다가 겨우 빠져나와서 젠장맞은, 아니 망할... 잠깐만요. 말은 예쁘게 해야지. 아무튼 제 일터로 가고 있거든요. 음, 제 입이 거칠다구요? 절대 아닙니다. 저는 바른 생활 대학생이에요. 이래봬도 동경대에 다니는 몸이란 말입니다. 학교의 이름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사장놈.. 그러니까 사장님을 보면 그렇게밖에 말 못합니다. 이건 제 인성 문제가 아니에요. 고용주가 바보거든요. 네, 뭐라구요? 말이 심하다구요? 아, 진짜로, 진짜 바보라니까요?

맞아요. 생각하시는 그 바보 맞습니다. 좀 어디가 모자란 사람 같다구요. 생긴 건 멀쩡하게...아냐. 생긴 것도 안 멀쩡해. 괴상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데 그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린 게 나을텐데. 아 하여튼, 생긴 것부터 안 멀쩡한데다 성격은 애가 따로 없습니다. 맨날 괴상한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녀요. 가게 안에서! 사장이란 인간이! 뛰어다닌다니까요? 정말 짜증나고 피곤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2등은 갈 것을 꼭 돌아다녀서 사고를 쳐요. 2개월 일하는 동안 제가 안 본 꼴이 없습니다. 욕 먹을 짓은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그걸 수습하는 건 다 알바인 내 몫이고요! 젠장! 그리고 직업은 배구선수랬나... 아, 직업만은 멀쩡하네요. 맞다, 남편분도 멀쩡해요. 멀쩡한 정도가 아니지. 그 정도면 성자입니다, 성자. 우리 사장놈이라 욕하기 좀 뭐하기는 하지만, 남편분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어디서 크게 사기당하고 길바닥에 나앉았을 거에요. 난 확신해. 그렇게 보면... 뭐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나 봅니다.

 

아무튼, 저는 그 이상한 사장이 부업이랍시고 운영하고 있는 토끼 컨셉의 빵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토끼"라니요! 내가 귀여운 걸 얼마나 증오하는데, 토끼라니요. 일하는 내내 토끼 브로치가 달린 앞치마에,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심지어 누군가가 들어올 때는 '토끼토끼 베이커리에 어서오세요~ '라고 외쳐야 합니다! 작명 센스가 왜 그따위인지 모르겠네요. 학교 다닐때 공부 안 했냐고, 젠장! 최근에는 사장놈이 봄 시즌이니까 벚꽃 어쩌구 컨셉이라면서 분홍색 앞치마를 가져왔습니다. 입으라면 입어야죠. 그래서 입기는 하는데, 전 난색 계열은 싫단 말입니다!

아무튼, 사장놈이랑 오시는 손님들은 화사해보이고 귀엽다고 좋아하는데 저는 딱 싫습니다. 귀엽다는 소리 듣는 게 제일 싫다구요. 그렇게 싫다면서 왜 거기서 계속 일하냐고 물으신다면, 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속물같긴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급을 무지 세게 주거든요. 사장놈이 숫자에 워낙 약해서 남편분이 회계를 맡고 있는데, 공부하기도 힘든데 사장놈까지 챙기느라 너무 고생이 많다면서 다른 가게의 거의 두 배가 넘게 줘요. 쩔지 않습니까? 사장이 좀 거지같고 귀엽다는 소리 좀 들으면 어떻습니까. 그 돈으로 제가 시라스동을 얼마나 많이 사먹을 수 있는데요. 부르주아 생활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 시급이면, 자존심쯤은 고이 접어서 넣어둬도 안 죽어요.

 

 


2. 오, 하느님 맙소사!


...는 개뿔. 아까 한 말 다 취소입니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끓어오르는 욕을 삼켜야 했습니다. 오늘은 사장놈이 없는 날이니 그나마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웬걸. 가게가 온통 밀가루 투성이길래 설마설마 하면서 제빵실을 확인해 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놈이 온 몸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빵이 안 구워진다고 징징대면서 제빵장님을 들들 볶고 있더군요. 저...저... 아오 씨.... 밀가루는 잘 닦이지도 않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바닥을 이 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랍니까? 지가 치울 것도 아니면서! 아., 이러면 안 돼요. 진정해야죠. 아무튼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분이랑 기념일이라 쿠키를 구워서 선물로 줄 계획이랍니다. 제 인상이 무지 더러웠는지 눈치를 살피면서 케이지가 좋아하겠지....? 묻는데 어이가 없어서 그냥 건성으로 예예 대답해 드렸습니다. 저 인간이 만든 생화학무기를 먹을 남편분도 참 불쌍합니다.

뭐, 어쨌든 다 치우고 나니 벌써 점심때입니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알바생으로서 더러운 가게 꼴을 보이는 건 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 일이니까요. 의자에 앉아서 한 숨 돌리면서, 딱히 배 고프지도 않으니 오늘 점심은 거를까, 아님 대충 아무거나 집어먹고 계산할까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

 

 

 

 


3. 그 빵집 사장님의 친구

 


보쿠토의 빵집에 초대받았다. 토끼 컨셉의 빵집이라니, 내가 토끼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주말에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지금 길을 찾고 있는데... 아무래도 네비게이션, 너는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분명 이쯤이라고 했는데 왜 안 보이지..? 아, 저쪽 가게에서 토끼가 나왔다. 다음 블록에 있는데 여기서 찾고 있었으니 보일 리가 없는 거였군. 그나저나 이 건물은 주차할 곳이 마땅치가 않은데... 다음번에는 운동도 할 겸 걸어와야겠다. 

그런데, 남의 가게에 초대받았는데 뭔가 사들고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역시 그건 예의가 아니다. 음료수 세트라도 사들고 가야겠는데. 아, 저기 마트가 보이는군. 보쿠토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으니 종합세트가 좋겠다. 날이 좀 더운 것 같다. 반팔을 꺼낼 때가 온 건가 싶기도 하고.  

딸랑 울리는 차임소리가 경쾌하다. "토끼토끼 베이커리에 어서 오세요!" 토끼토끼 베이커리라니, 보쿠토다운 작명이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토끼도 그렇고, 봄 시즌에 맞춰서 화사하게 꾸며놓은 가게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귀여운 게 마음에 드.... 아, 잠깐. 토끼가 아니라 직원이었어? 정말 귀엽게 생겼군. 하느님 맙소사. 뭐 필요하신 거 없냐고 묻는 목소리마저도 귀엽다. 얼굴은 왜 빨간 건지 모르겠지만. 기침을 하는 걸로 봐서는 어딘가 아픈 건가 싶다. 

 

 


4. 그 알바생,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오늘부로 저는 이 빵집에 뼈를 묻기로 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저 멍청한 사장놈이 꼴에 국가대표 배구선수라더니, 맙소사! 뭐에 감사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사장놈, 아니 사장님 욕 안 하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정말 받들어 모실 겁니다! 진심이라구요!

아,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당연히 대답해 드려야죠. 네, 그럼요.  뭐냐면, 사장님 친구분이 아까 전에 사장님을 보러 오셨는데, 그 분이 너무 제 이상형이었다, 이 말입니다. 잘 보이는 데는 실패했지만요. 제가 좀 바보같이 굴었거든요. 너무 긴장해서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서는 기침하고 켁켁거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 생각하니까 너무 쪽팔리잖아요!

괜찮다고 하지 마세요. 전혀 괜찮을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저한테 괜찮냐고 물도 주시고 막 쳐다보시는데 저는 켁켁거리느라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구요. 단 한 마디도! 한 마디도 못 했단 말입니다! 그분은 제가 감기라도 걸린 줄 알아요! 젠장맞을! 게다가 사장놈이 오는 바람에 감기가 아니라고 해명도 못 했죠! 이렇게 분할 수가 없습니다. 그놈의 사장은, 왜 하필 오늘 남편분한테 빵을 만들어주겠다며 출근해서는 가게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건지... 욕을 안 하려고 했는데 욕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우시지마 씨. 우시지마 씨가 제가 아픈 것 같다며, "병자를 카운터에 세워 놓으면 손님들에게 감기를 옮길 수 있으니 위험하다"고 하셨거든요? 저보고 병자라고 했단 말입니다. 병자! 그러니까 밀가루를 덕지덕지 칠하고 나온 사장놈이 제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응? 시라부 안 아픈데?"라고 했죠. 문제는, 망할 밀가루가 제 콧구멍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그 불태워버려도 시원찮을 밀가루 때문에 제가 더 켁켁거리니까 그분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들고 온 선물박스 같은 것을 내려놓으며 자기가 일을 돕겠다고 하시더군요. 사장놈은 제가 진짜 아픈 줄 알았는지, 혹사시켜서 미안하다며 제 등을 두드리고는(말이 두드린 거지 퍽퍽 때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사무실 가서 서류 정리를 좀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우시지마 씨가 무지 잘 보인다는 게 다행입니다. 서류 정리는 진작에 마쳤죠. 지금은 우시지마 씨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기분이요? 째집니다. 더이상 째질 기분이 없을 만큼이요!

 

그, 제가 귀여운 거 정말 싫어한다고 아까 전에 말씀드렸었나요? 그 시라부 켄지로는 죽었습니다. 이제 없어요. 취향은 변하는 거죠. 그냥 갈아엎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귀여운 걸 싫어하다니, 세상에 그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요? 저 사람을 보시라구요. 저건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저렇게 귀여울 수 있습니까? 저 커다란 덩치에, 저 프릴 달린 앞치마를 어떻게 저렇게 귀엽게 소화하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땐 너무 멋있는데, 손님이 말씀하신 디저트를 못 찾아서 우물쭈물하는 건 또 귀여워 죽겠습니다.

 

게다가 벌써 열다섯 명째입니다. 15가 무슨 숫자냐구요? 우시지마 씨가 싸인하고 사진을 찍어준 사람 수입니다. 우시지마 씨는 아주 유명한 배구선수인가 봅니다. V리그에는 관심 없어서 잘 몰랐는데. 하기야 국대급 선수면 실력도 엄청나겠죠? 게다가 저렇게 잘생겼는데! 인기가 없을 수가 없겠네요. 분명 멋진 애인도 있겠지요. 저런 분한테 사랑받는 그 애인은 정말 세상 다 가진 기분일 것 같습니다. 부러워요... 응? 아니 나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어떡하지, 아무래도 처음 본 사람한테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축하한다구요? 축하요?!?!?? 이제 저한테도 봄이 왔다구요? 제정신입니까? 이건 미친 짓이에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미야기에서는 로지컬의 상징이었던 저 시라부 켄지로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미친 전개의 주인공이라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단 말입니다!

 

 

 

 


...뭐 어때요.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미칠 수도 있지. 봄이잖아요.

 

 

 

 


5. 사장의 친구는 곤란합니다.

보쿠토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들어온 손님이 딸기 레어치즈 토끼토끼 타르트와 체리블로썸...어쩌구를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게 뭔지 못 찾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손님이 여기요, 하면서 짚어주셨다. 일단 계산하고 진동벨을 드리긴 했는데... 타르트를 꺼내서 접시에 담고 나니 음료가 막막하다. 체리 뭐였지.. 아, 여기 만드는 법 쓰여 있다. 알바생이 써 놓은건가. 꽤 자세하게 쓰여 있군. 초보자도 아주 쉽게 따라할 수 있게 써놓아서, 나한테는 좀 다행이다.

 

진동벨을 울리니 일행인 듯한 다른 분이 받으러 왔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혹시 우시지마 씨를 아시냐고 묻길래 내가 그 우시지마 와카토시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엄청난 배구 팬이었던 건지 꺅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당황했다. 친구 가게의 일을 좀 돕고 있다고 하니 역시... 보쿠토 씨 가게라더니...하며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쓰러져서 죽어버리면 뒤처리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싸인을 해주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에 한숨 돌리려는데, 아까 그 토끼... 아니,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아까부터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 역시 아픈 건 아니었나..? 아냐. 얼굴이 빨갛다. 열이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그냥 일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는 것 같다. 책임감이 강한 타입인 건가... 딱히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건 역시 좀 곤란하다. 나는 이 가게에 오는 게 처음이고, 계속 운동을 해서 베이커리 일도 해본 적 없으니까, 서투른 게 당연한데. 왜 자꾸 웃는건지 모르겠다. 

 

신경이 쓰인다.

 

얼만큼? 음, 많이. 아주 신경쓰인다. 이름이 뭐랬더라..시라부랬지. 동그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내 움직임을 바쁘게 쫓다가, 내가 실수를 하면 아주 즐거운 얼굴이 되어서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책상에 엎어져 어깨를 들썩인다. 아마 웃는 것 같다. 남이 그랬다면 비웃는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나빴을 텐데, 저 애는, 음.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예쁘다. 마음에 들고. 내가 그리 우습냐고,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말 걸어보고 싶다. 이상하다고? 알고 있다.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

 

 


6. 그 알바생, 영 젬병입니다.

 


어... 저분 연락처 물어보고 싶어요. 아니다, 제 연락처를 먼저 드리는 게 순서일까요? 국가대표인데다 잘생겼으니까, 주위에 달라붙는 사람도 많을까요? 그렇다면 제가 연락처를 드리는 것도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친해지고 싶은걸요. 저 분을 더 알고 싶습니다.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키가 어떻다느니, 소속팀이 어떻다느니 하는 거 말고, 뭘 좋아하는지, 쉴 때는 뭘 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그런 것들말이에요. 음... 지금 제 모습이 바보같다고 하시면 죽여버릴 거에요. 저도 바보같은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한테 바보라느니, 미쳤다느니 할 수 있는 건 저뿐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한참 우시지마 씨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시라부!!! 시-라부우!!!!!"

 

뭐지? 달려나가보니 사장님 남편분이 와 계시더군요. 사장님이 만든 쿠키가 한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계셨습니다. 음, 표정은 좀 기쁜 것 같아 보였지만... 맛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일 텐데. 역시나 걱정입니다. 아무튼 사장님은 우시지마 씨를 불러오려고 하는 제게 그 분께는 미리 인사를 해 뒀다고 하시고는, 제게 봉투를 하나 쥐어주시면서 "오늘 수고했으니까 일찍 마감하고 둘이 어디 가서 맛난 거라도 사먹어! 날씨도 좋은데!"라고 하시고는 가셨습니다.

.....기회입니까? 이거 기회인 겁니까?

 

기회인 것 같습니다. 웬일로 사장님이 제게 도움을 주셨단 말입니다! 알바생의 연애사업까지 도와주다니! 정말 좋은 고용주가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고 말을 꺼내지요? 다시 가게로 들어가니 우시지마 씨가 카운터에 서서 저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저기....하고 부르긴 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묻는 낮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습니다. 머릿속은 그만 새하얘져 버렸습니다.

 

 

"그.. 사장님이 식사 하고 가라고, 하셨는데,"
"아직 가게 닫을 시간이 안 되지 않았습니까?"
"아, 오늘은 일찍 마감하라고 하셔서..."

손짓발짓 해가며 말하고 나니 제가 생각해도 바보같습니다. 이렇게 말을 못 하는 성격이 아닌데... 다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습니다. 바보같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어떡하죠? 

"...감기에 걸렸으니, 죽 종류가....." 
"감기 아니에요....!  저 건강합니다!"

의도치 않게 빽 소리를 질러 버렸습니다. 우시지마 씨가 놀란 눈으로 쳐다봅니다. 저도 놀랐어요. 아, 죽고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기도 아닌데, 죽집에 가고 싶진 않단 말입니다. 어떡하지, 어쩔줄 몰라하는 사이 입이 제멋대로 사고를 쳐 버렸습니다.

"이 옆옆 가게에, 시라스동이 맛있는데,"

우시지마 씨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는 것 같습니다. 역시, 너무 아저씨 같은 메뉴였나봐요. 미친놈! 하필 많고 많은 메뉴 중에 시라스동이 뭐냔 말입니다! 잘 보이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의 연애사업은 아주 망했습니다. 망했어요! 연애에 한이 맺힌 귀신이라도 붙은 게 분명합니다! 밖을 보니 아직 노을이 지는 시간이고.. 노을이 참 예쁘네요. 죽기 좋은 시간대입니다. 다음 생에는 꼭 이상형 앞에서도 떨지 않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7. 이거, 쌍방인 겁니까?

 


우시지마는 어쩐지 넋이 나가 보이는 시라부를 데리고 아까 말했던 가게에 들어가 앉는다. 아까 시라부 씨라고 불렀을 때는 기겁을 하면서 "저, 아직 대학생이니까, 편하게 반말하셔도 됩니다!" 라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지금은 어디가 불편한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역시 몸이 아픈 건가? 습관인 듯 저도 모르게 탁자를 탁탁탁 두드리는 손이 무척 조그맣다. 몸집도 작고. 얼굴도 아직 앳된 티를 못 벗어서 전체적으로 귀엽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시라스동이라니. 전혀 의외의 조합이다. 입맛이 외모와 비례하라는 법은 없지.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미소를 짓는다. 뭐 어때. 싫지 않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팔을 뻗어 그 하얗고 예쁜 손을 잡는다.

 

히이익!!

 

느닷없이 제 손을 감싸온 커다란 손에 시라부가 기절할 듯 놀라면서 우시지마를 바라본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웃음기 어린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하며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 꼼지락거리는 게 귀여워서, 우시지마는 부러 손에 힘을 더 준다. 시라부의 얼굴이 괜찮은 건가 싶을 만큼 빨개진다. "....손, ㄴ, 놔 주세요," 더듬더듬 말하고 나서야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손을 놓아주었다. 기실 그것은 평소 같으면 '니 손이 팔에 곱게 붙어 있을 때 놔라, X새끼야' 라고 했을 시라부였기에, 말 그대로 부탁에 서툴러서 그런 것이었으나, 어찌됐든 우시지마는 귀엽다고 느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투박한 손이 닿은 자리에서 맥박이 쿵쿵 뛰는 것만 같아서 시라부는 괜히 손을 쥐락펴락 꼼지락거린다. 그 모습을 보던 우시지마는 간질간질해져오는 속을 가라앉히려 부러 헛기침을 한다. 아, 이 귀여운 생물을 어떻게 하면 좋지. 옆에 두고 예뻐해주고 싶다. 다분히 충동적이지만 이 간질간질함 또한 연애감정의 한 형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시지마였다. 열애설이 터지는 건 상관없다. 며칠 전 들른 본가에서는 애인 좀 사귀라고 난리셨으니. 그렇지만 이 애의 마음은...? 복잡하게 돌아가는 우시지마의 머릿속과는 상관없이 시라부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암녹색의 눈이 일순간 빛났다. 정말로, 아픈 게 아니었군. 처음부터.

숨기려고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뭐, 기사가 나면 어때. 이쪽에서 곤란할 일은 없다. 인기보다는 실력으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다, 본가 어른들은 어찌됐든 우시지마의 안목을 믿고 찬성할 것이었다. 만약 저쪽에서 곤란해한다면 집안이나 에이전시에 부탁해 막아달라 하면 될 일이다. 명쾌하군.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만족감으로 빠듯이 차오르는 마음을 무표정으로 가리며, 우시지마가 입을 연다. "내 이름은 우시지마 와카토시. 스물아홉 살이고, 알다시피 배구선수다." 응? 놀란 토끼눈을 하고 바라보는 시라부에게, 네 이름은 뭐냐고 묻는다. 어...어? 뭐야? 이름은 왜 물어봐? 당황해서 허둥지둥 동경대 수학과 2학년, 시라부 켄지로라며 저를 소개하는 모습을 우시지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본다. 본인 기준에만 부드럽게였지만. 시라부의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가 싶어 무서웠다. 본인이 의도적으로 웃음을 지으면 아주 무서운 표정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왜 흠칫하는지 몰라 잠깐 의아했으나, 이내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문제가 있냐고 물어볼 타이밍은 놓쳐버렸다. 밥을 먹는 내내 행복한 얼굴로 한 입 가득 오물오물거리는 모습만을 눈에 담는다. 대학교 2학년이면, 스물하나인가. 어쩌면 스물둘? 너무 어린애 아니냐는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때. 우시지마가 픽 웃는다. 스물 넘었으면 어엿한 성인이지.

 

 

 

 


8. 그 알바생과 배구선수, 아마 오늘부터 1일입니다

 


알림이 울리지 않는데도 일어날 시간이 되자 시라부는 습관적으로 알람시계가 있는 자리를 퍽퍽 때리며 눈을 떴다.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에 데워진 이부자리에서 약하게 햇살 냄새가 난다. 이상하다. 내 방은 햇살 안 드는데...? 그제야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의 감촉에 위화감을 느낀 시라부는, 반쯤 뜨인 눈에 비친 익숙지 않은 방 풍경에 눈을 번쩍 떴다가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감는다. 뭐야, 여기 어디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께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와 악 소리를 내며 그대로 엎어져버렸다. 온 몸이 얻어맞은 듯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제 우시지마 씨랑 밥 먹고, 아, 내가 술집 가자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일어났나, 켄지로."

우시지마는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허리 아래에 수건만 한 장 걸치고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온다. 당황해서 새빨개진 채 제 상체를 이불로 가린 시라부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대체 이게... 아. 어제, 술 마시고, 아.. 맙소사.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게 원망스럽다.

저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냐고 묻는 우시지마에게, 술에 잔뜩 취해서는 당신이 제 이상형인데, 만나자마자 반했다느니 하던 소리나 지껄여댔지. 다 기억나버렸다. 그 말에 웃는 게 왠지 애송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혼자 시무룩해서는 애인이 있냐고 물었다가, 없다는 말에 반색하면서 그럼 제게 기회를 달라고, 우시지마가 겪어본 어떤 사람보다 제가 잘 할 거라며 경험도 없는 주제에 되도 않는 도발을 한 자신이. 의중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후회하지 말라며 기꺼이 응한 우시지마도.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운동선수라 그런지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여러 의미로. 그리고 자신은... 그러니까 그 모든 게 기억나 버려서, 아 X발 맙소사, 욕까지 씹어뱉어 가며 제 머리를 움켜쥔다.

시라부는 "괜찮은 건가, 어제는 내가 너무 배려없이 몰아붙였다. 미안하군." 하며 다가오는 우시지마에게 "오, 오지 마세요!" 소리치며 이불에 머리를 푹 쑤셔박았다.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시라부 켄지로! 난 망했어! 죽어버릴 거야! 하며 속으로 절규했지만 우시지마가 들었을 리 없다. 그저 이불 밖으로 드러난 시라부의 몸에 제가 남긴 간밤의 자국들이 선명한 것이 만족스러웠고, 부끄러운 것인지 목덜미와 귓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웅크린 저 조그만 아이가, 귀여웠다.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우시지마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성큼성큼 다가가 아, 으아, 아, 아아.... 앓는 소리만 내뱉는 시라부의 몸을 안아들고 제 무릎에 앉혔다. 잘게 떠는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묻는다. 

"어땠나." 

나는 최고였는데. 네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시라부의 눈은 애처로울 만치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수치심으로 잔뜩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황토색 눈동자에 제가 가득 담긴 것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죄송해요, 제가, 술에 취해서, 역시 없었던 일로, 더듬거리는 시라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무슨 소리야. 왜 없었던 일로 하지?" 그 조그만 머리로 무슨 귀여운 생각을 했길래. 

"...제가, 헛소리 해대서, 하룻밤 놀아주신 거니까," 
"아닌데." 

말을 잘라먹고 들어오는 우시지마의 표정이 굳어있다. 그 의중을 몰라 끔뻑끔뻑 쳐다보자, 무심한 표정으로 어마어마한 폭탄을 날린다. "마음 맞고 몸 맞추는 관계가 있으면, 몸 먼저 맞추고 마음 맞는 관계도 있는 거지. 그리고 난 켄지로, 네가 마음에 든다. 문제 있나?"

 

이쪽을 그렇게 가볍게 봤다니, 유감이다. 아무데나 뿌리고 다니는 취미는 없다. 네 서툰 도발에 어울려준 것은 네가 아주,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것뿐인데.

아, 아니요. 문제 없습니다. 시라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저를 가둔 단단한 팔에 머리를 기댄다. 긍정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잠시 안고 있다가 침대에 누이고 모랫빛 머리칼 사이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흩뜨렸다. 동그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시라부에게,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지만, 지금은 좀 더 자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간밤에 무리했으니까..." 하고는 방문을 닫고 나간다. 열린 창틈으로 햇살과 함께 봄바람이 들어와 머릿결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시라부는 이불 속에 폭 파묻혀서 눈을 깜빡인다. 

정신나간 상황이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데, 오늘부터 1일인 것 같다. 만난 지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러면 안 되냐는 생각이 먼저 든다. 술이 덜 깼나, 아님 진짜로 봄바람이 들어서 미친 건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잠기운이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내 시라부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감고 피식 웃는다. 

뭐, 어때.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미칠 수도 있지.

후기...
 시리즈가 아닌 글로 만 자 넘게 쓰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래도 전부터 써야지 써야지 생각하고 있던 소재라 쓰기는 금방 썼답니다! 퇴고를 여러 번 거치지는 못했지만요ㅜㅠ

지난 호까지 연재했던 게 다소 어두운 내용이었어서, 이번엔 우시지마랑 시라부가 서로의 이상형이라 첫눈에 반하는 달달한 게 보고싶어! 하면서 쓴 거였는데 마감이랑 시험기간이 겹쳐서 급히 쓰다 보니 캐붕도 심하고 개연성도 없네요... 5월호는 정말 생각을 많이 하고 써야겠습니다.

 그래도... 이 글까지 보고 계시다면 아마 즐겁게 읽어주신 것이리라 믿습니다..8ㅅ8!!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언제나 감사하고,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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