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삭제하시겠습니까?
랑하
[ 이 연락처를 삭제하시겠습니까? ]
예. 시라부 켄지로는 입으로 작게 소리내어 핸드폰의 안내 메시지를 읽었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삭제 버튼을 힘주어 꾹 누르고,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지고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툭, 하고 이불과 핸드폰이 마찰을 빚는 소리에 정신이 사나워져 괜히 심술만 부리고 허공에 두어 번 발길질했다. ...한심하다. 기운이 빠졌는지 이내 침대에 기대고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시라부가 씹어뱉듯 말을 토해내었다.
시라토리자와 배구부 주전 세터가 되어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토스를 올렸던 1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겨울이 되고, 새해가 밝고, 그렇게 추운 날씨에 입을 벌려 한숨과 입김을 함께 내쉬는 게 익숙해질 즈음. 3학년들의 졸업식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야. 이제 3학년이 되어 배구부 주장 마크를 달게 될 시라부는 졸업식을 마친 3학년들이 체육관으로 들어오면 대표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조촐한 파티를 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시라부는 겨울이 되면 늘 달고 다니는 감기가 도졌고, 푹 쉬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하고 질질 병을 끌고 온 것이 오늘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질긴 놈이었는지 오늘까지도 떨어질 생각을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아눕게 되었다. 거울 속에 비친 저 자신을 보니 초췌하기 그지없는 몰골과 잔뜩 붉어진 얼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우시지마상을 만나게 된다면 난 뛰어내릴 거야. 작게 중얼거린 시라부는 이내 카와니시 타이치에게 감기에 걸렸다는 메일을 전송하고 핸드폰 전원 종료 버튼을 눌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손만 뻗어 침대 맡을 더듬어 시계를 든 시라부가 잘 안 보였는지 찡그리며 눈앞으로 시계를 갖고 왔다. 5시? 충분히 파티가 끝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오늘은 시라토리자와 교복을 입은 우시지마의 실물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시라부는 황급히 욕실로 달려가서 대충 세수를 하고, 교복과 겉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마스크를 낀 채 휴대폰만 챙겨서 학교를 향해 아픈 몸을 이끌고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체육관 문을 열자, 카와니시와 고시키 츠토무, 텐도 사토리, 그리고, 우시지마가 있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했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아이에게 공개적으로 고백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사귀었을 때보다, 그 아이에게 매일같이 작은 선물을 받고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보다, 단순히 우시지마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 조차로도 훨씬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생전 처음 우시지마가 꿈에 나왔던 날, 시라부는 내내 부정하던 감정에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날로 여자 친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시라부는 세터로서의 자신과는 다르게 우시지마의 뒤를 좇으며 하루하루 제가 그어놓은 선을 넘쳐나는 감정 턱에 힘겹게 살아야 했다. 그런 제 눈앞에 우시지마가 보였다. 옆에서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텐도가 호들갑 떨며 입을 가리고 시라부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 켄지로, 아프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우리 보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
" 네, 맞아요. 텐도 선배. 잠시 자리 좀 비켜주세요. "
눈치 빠른 텐도에게 말하면 그럭저럭 알아채고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리라. 예상대로 들어맞았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왜요? 를 연발하고 있는 고시키의 팔을 잡아든 카와니시와 텐도가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우, 우시지마 선배. 시라부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고 나서 속으로 흠칫했다. 제 앞에서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뛰어왔는지 가쁘게 숨을 내쉬는 후배를 본 우시지마가 평소보다는 조금 더 다정함이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시라부. 분명 포기하리라 마음먹고 왔음에도 파르르 손이 떨리자 시라부는 손톱을 꾹 눌러 박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제저녁에 교복 마이에서 뜯은 두 번째 단추를 우시지마에게 주기 위해, 넣어놓았... ...아, 급하게 나오느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깜빡한 채 왔나보다. 깨달은 시라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위해 사람들을 물린 건데,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건데.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우시지마에게 무언가 말이라도 해야 했다.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선배,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
"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가? 전화나 문자로 해도 됐을 텐데. "
악의라곤 전혀 담겨있지 않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뿐인 우시지마의 말에 시라부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턱 끝까지 문장이 차올랐지만, 용기가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시지마 역시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짧게 그렇군. 하고 말한 뒤 시라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시라부는 고개를 떨구었다.
" 저는 병원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
" 그래. 몸 관리 잘 하고, 종종 연락해라. "
선배에게 이제 자신은 부활동을 같이 했던 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남을 것이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에, 용기 없는 한심한 제 자신에게 치가 떨려 체육관 앞에서 귀를 대고 있던 텐도에게 꾸벅 인사한 후 집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연락해라.' 우시지마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안 돼요, 선배. 더 이상 제 마음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시면서 저를 휘두르지 말아주세요. 희망을 주지 마세요.
도착하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한참을 흐느끼던 시라부는 울음을 멈춘 뒤 우시지마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일어나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자 [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 라는 안내 메세지가 떠 있었다. 마치 제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려는 것 같아서, 제 안에 아직 남아있는 미련을 뜻하는 것 같아서 시라부는 기분이 나빠졌다. 삭제 버튼을 힘주어 눌렀다. 며칠 동안 연락처에 없는 번호로 두어 번 전화가 왔다. 주인이 누군지 모를 리 없는 시라부였지만, 애써 외면하고 아예 스팸 차단까지 해놓았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우시지마는 프로 배구선수가 되어서 더욱 위로 향할 사람이었다. 감히 제가 옆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빛나는 사람이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1년간 토스를 올려봤다는 것으로도, 그의 추억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디. 그렇게 시라부 켄지로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짝사랑이 끝을 맺었다.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건 굉장히 멍청한 생각이었다. 몇 개월 전의 시라부는 시라토리자와 배구부 모임이 있을 것이고, 제가 앞으로 배구부에 남아있는 한 3학년 OB들이 가끔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3학년이 졸업하고 시라부가 주장 마크를 단지 두 달째. 봄내음이 서서히 가시고 여름이라는 느낌이 완연해질 때. 우시지마가 찾아온다는 말이 배구부 내에 돌았다. 몇몇 선배들은 가끔 찾아 왔지만 그 유명한 우시지마가 방문한다는 것은 꽤나 큰 사건이었고, 지루하게 연습만 종일 하던 배구부 내에 특급 이슈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언제? 언제 오시는데. 당황한 시라부가 카와니시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오후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카와니시의 대답이 돌아오자, 시라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 나 오늘 부활 안 가. 도서관 갈 거니까 끝나고 전화해. "
" 뒷감당은 어떻게 하게? "
" 몰라. 그냥 감독님께 혼나고 말래. "
카와니시의 놀란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라부가 체육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주하기 싫었다. 그 사람을 다시 본다면 애써 정리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천천히 저 자신을 잠식해갈 것이 분명했다. 시라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사서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셨는지 텅 빈 도서관에 의아해하던 시라부는 800번대 서가로 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꺼냈다. 기욤 뮈소의 소설이었다. 이 사람 작품에는 왜 하필 사랑 얘기가 꼭 들어가 있는 거야? 애꿎은 작가에게 화풀이한 시라부가 책장을 넘겼다. 반 즈음 읽었을까, 그때부터 글씨가 잘 읽히지 않았다. 책의 주인공이 연인에게 속삭이는 대사가 전부 이상하게 보였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증거였다. 속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곤 밖을 내다보았다.
때마침 우시지마가 부원들과 인사를 끝냈는지, 와시조 감독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있었다. 도서관은 시라토리자와 학원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올려다보지 마라, 쳐다보지 마라... 창가를 꼭 붙들고 눈가만 뺀 채 밖을 내다보고 있던 시라부는 속으로 기도했다. 그 간절한 염원이 닿았는지, 우시지마가 시라부 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라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소파에 발이 걸려 그대로 소파 누운 꼴이 되어버렸다. 미쳤어... 카와니시가 말씀드렸나. 속으로 생각만 하던 시라부가 자신의 뺨을 세게 쳤다. 짝, 하는 큰 소리가 비어있는 도서관을 울렸다. 그때 도서관 문을 열고 카와니시가 들어왔다.
" 시라부? 맞구나. 방금 소리, 너였어? "
" ... "
" ...울어? "
시라부가 얼얼해진 뺨을 아무 말 없이 문질렀다. 카와니시가 천천히 다가와서 허리를 숙이고 시라부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이 빨개진 볼을 타고 흘러내려 하나로 맺히고 있었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끝난 것 같았는데... 나 죽을 것 같은데, 타이치, 어떡하지. 이런 건 처음이란 말야. 이런 건... 시라부가 카와니시에게 기대어 울면서 정신없이 내뱉었다. 친구의 생소한 모습에 멈칫한 카와니시가 한숨을 푹 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 졸업식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고백한 거 아니었구나. "
" 난 용기 없어서 고백 못 해. "
시라부와 카와니시는 누가 볼까 싶어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공원에서 코를 훌쩍이던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천천히 입 안에서 녹였다. 달달함이 잔뜩 퍼지자 그제서야 표정이 풀리는 시라부를 본 카와니시가 크게 웃으며 저도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 대학교, 어디 갈 거라 했지? "
" 도쿄로. 카와니시 넌 그대로 여기 있을 거지? "
" 응, 종종 놀러갈게. "
" 10시간 거리를? "
카와니시가 어느새 깨끗하게 비운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조금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걸 느낀 시라부가 눈가를 문지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놀러 와. 예기치 못한 웃음에 놀란 듯 카와니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시라부는 도쿄에 있는 제법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했고, 입학과 동시에 고교 친구들과 선후배들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심지어 핸드폰을 새로 바꾸어서 카와니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연락처를 삭제하고, 카와니시에게는 1년에 한 번쯤 살아있다는 문자 정도만 하라고 말해두었다. 카와니시 역시 번호를 바꾸고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미야기 말고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글쎄, 왜 그랬냐면,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정도의 이유일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시지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려고 마음먹었다. 국가대표가 되어 TV에 우시지마나 그가 속한 팀의 배구 경기가 나올 때면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리곤 했다. 어쩔 수 없이 생각났을 때는 대학교에서 과 선배가 고등학교 때 부 활동을 뭘 했냐고 물어볼 때뿐이었다. MT에서, 새내기인 시라부에게 어떤 여자 선배가 물은 적이 있었다. 시라부 군은 하얗고 여리여리해서 막, 꽃꽂이 같은 거 했을 거 같은데. 부 활동 뭐 했어? 시라부는 애써 찡그리지 않은 채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배구요. 중학교 때부터 6년 정도 했습니다. 와, 멋있다~ 여선배는 살갑게 웃어 보이며 대놓고 시라부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부담스러워. 시라부는 선배들이 주는 술을 요령껏 버리며 MT를 무사히 넘겼다.
대학 생활은 걱정했던 것보다 순탄했다. 학점 따기는 힘들었지만, 고입과 대입 둘 다 해냈는데 학점 관리 못 할까 싶은 마음에 도서관과 기숙사, 강의동만 번갈아 다녔다. 어느 날, 시라부는 카와니시에게 일이 있어서 도쿄로 올라왔다는 내용의 문자를 받게 되었다.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좋겠지, 싶어서, 시라부는 그날 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열차가 들어옵니다. 안내 음성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간발의 차이로 늦은 시라부가 닫히는 문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아, 약속 시각까진 40분 정도 남았으니까. 지하철로 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시라부는 안심하고 문 바로 앞에 선 뒤 핸드폰을 꺼냈다. [ 타이치 어디야? ], [ 지하철 기다리는 중. ] 따위의 시답잖은 문자도 오랜만에 해보고, 시험도 끝났기 때문에 공부할 것도 없어서 갤러리나 뒤적이고 있었다. 할 것도 딱히 없네. 시라부는 문득 지하철이 언제 오나 싶어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와, 첫눈이네. 시라부가 고개를 돌아 뒤를 보았다. 밖에서 눈송이가 하나씩 떨어지더니 창문에 부딪혀 천천히 허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려 열차 시각을 확인하고, 무의식적으로 건너편 플랫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쿵, 하고 심장이 땅에 부딪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너편에서, 이제는 다시 마주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우시지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까지 써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눈밖에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눈을 잊을 리 없었다. 넘치는 마음을 꼭꼭 상자 안에 밀어 넣어 애써 잠가두었던 것이 아예 상자를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우시지마가 쓰고 있던 검은색 마스크를 턱으로 내렸다.
" 선배? "
시라부의 입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잘게 떨리며 새어나갔다. 우시지마가 시계를 잠시 보더니 입 모양으로 뭐라 말을 했다. 시라부. 제 이름까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 뒤는 불명확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대답하자마자 건너편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타이밍은 안 맞는 걸까요. 늘 나와 선배 사이에는. 시라부는 속으로 작게 외쳤다. 가지 마세요. 저를 기다려주세요. 이쪽으로 건너와 주세요... 열차가 지나가고, 마치 찰나의 꿈이었던 것처럼 우시지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허상이었나, 그 정도로 보고 싶었나, 아니, 분명히 계셨는데. 시라부가 손을 덜덜 떨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약 2년 전쯤에 보았던 안내 메시지가 문득 생각났다. 거의 다 와 간다는 카와니시의 문자는 잠시 제쳐놓고, 키패드에 제가 기억하는 우시지마의 번호를 눌러 스팸 차단을 해제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간다. 신호음이 들리자 시라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어차피 피할 수 없었던 것을, 이렇게 다시 만날 거였으면 그렇게 피해 다니지 말 것을.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
" ... "
순간적으로 시라부의 표정이 굳어졌다. TV에서 아주 잠깐만 보려고 했다가 결국 전부 보았던 우시지마의 인터뷰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친하지 않던 사람까지 연락이 마구 오길래 저신이 저장해놓지 않은 사람의 번호는 차단이 되도록 설정해 놓았다던, 말. 시라부는 핸드폰을 새로 바꾸면서 연락처까지 바꾸었다. 천천히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툭! 바닥에 핸드폰이 떨어졌지만 사람들의 목소리에, 둔탁한 소음이 그대로 묻혔다. 이제서야 겨우 말을 걸 자신감이 생겼는데. 전화를 걸고 자연스레 안부를 묻을 뻔뻔함이 생겼는데.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했다고 자랑할 용기가 생겼는데. 카와니시에게 기대어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자신에게 기대라고 해줄 사람조차 없다. 시라부는 원래 타인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여전했다. 투둑, 어느새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차가운 대리석 위로 떨어져 동그란 원을 그렸다.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줍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줄에서 빠져나와 빈 벤치 위에 앉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면 마음이 썩고 문드러져 사람 하나를 이렇게 무너지게 만들 수 있구나. 시라부가 생각했다. 그리고 작게 소리 내어 흐느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새어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은 시라부가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카와니시였다. 메시지를 읽으려던 시라부가 손을 멈추었다. [ 통화 기록을 삭제하시겠습니까? ] 우시지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록을 삭제하겠냐고 묻고 있었고, 시라부는 망설이다가 삭제 버튼을 눌렀다. 카와니시에게 가고 있어, 하고 문자를 보낸 시라부가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지하철이 도착했고, 줄의 맨 끝에 선 시라부가 사람들을 따라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힙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문이 닫히고, 시라부는 그제서야 벤치 위에 두고 온 것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추, 우시지마에게 주고 위해 갖고 있던 제 교복의 두 번째 단추였다.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핸드폰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빠졌나 보다. 시라부가 눈물을 그쳤다. 카와니시도 전화번호를 새로 바꾸었고, 저 또한 모두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우시지마에게 언젠가 주고 싶어서 갖고 다녔던 단추도 잃어버렸다.
우시지마와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한 줄기 미련마저 지하철 역사에 놓고 와버렸다. 시라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혼자만 노력했던 외사랑의 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문정희, <비망록>
생기부 마감을 비롯해 글 쓸 일이 많아져서 퇴고를 많이 못 거친 글을 제출하게 되었습니다...88
쵱컾 월간이 열린다는 게 정말 행복하고 제가 1월호에 참여했다는 게 굉장히 뿌듯하네요 히히
아직 많이 실력이 부족하지만 우백이 너무 좋아서 참여했습니다...ㅠㅅㅠ
언젠가 이 글을 다시 본다면 죽고싶어지겠죠... (아무말대잔치)
제 글은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고 존잘님들 글 그림 만화 봐주세요!!
사실 플랫폼에서 스크린도어 너머로 마주친 우백이 보고 싶어서 썼어요(._. )
시간 상의 문제로 잘린 썰은 @HQ_rangha로 조만간 업데이트 해놓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시시라와 함께 즐거운 2017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