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여분의 동심과

인연에 대하여

연구름

  그닥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조금 흐린 듯한 구름들이 하늘 위를 꾸물대고 있던 날씨였다. 올해로 여덟 번째의 겨울을 맞아가는 우시지마는 가족들과 소박한 여행을 나온 참이었다. 그동안에는 가족들과 여행을 간 적이 드무니 우시지마는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바람은 찼다. 우시지마는 작은 손을 움직여 목도리를 단단히 조여 맸다. 감기 걸리면 안 돼- 하고 당부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던 것이다. 겨울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이지만 따뜻하고 즐거운 가족 여행이었다. 우시지마는 찬바람이 스쳐지나가 발그래진 볼에도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유명한 관광 명소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시지마는 부모님과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앞장 서 있는 부모님을 따라잡으려 좁은 폭으로 종종 걷던 우시지마가 별안간 멈추어 섰다. 분명 눈은 안 왔는데. 우시지마는 제 눈을 동그랗게 떠보았다. 눈은 안 왔는데, 길가에 하얀 무언가가 있었다. 얼음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여덟 살의 우시지마가 그것에 다가갔다. 

 

 

 "…토끼!"

 

 

  하얗게만 보이던 물체가 드러났다. 우시지마의 발자국 소리에 조금 몸을 움직인 건 새하얀 토끼였다. 우시지마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토끼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하얗구나.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 만져 보고 싶다 는 생각에 우시지마가 가까이 다가가자 토끼가 두 발을 든 채 일어서 우시지마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마냥 닿아오는 고 빨간 눈에 우시지마는 잠시 굳어있었다. 토끼는 우시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코를 몇 번 찡긋거리고는 길 너머 풀숲으로 폴짝 폴짝 뛰어갔다.

 

  우시지마는 저도 모르게 그 토끼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회중시계를 들고, 옷을 입고 뛰는 토끼도 아니었지만 여덟 살의 우시지마는 토끼를 쫓아간 앨리스의 기분이 어떤지 알 것만 같았다. 한 뼘 한 뼘 뛸수록 길게 뻗어지는 다리와 짤막한 꼬리만을 주시한 채 우시지마가 토끼의 뒤를 따랐다. 거칠게 자란 들판의 풀들이 우시지마에게 닿아왔지만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 덕에 별다른 상처는 생기지 않았다. 토끼 뒤꽁무니를 따라가던 우시지마가 시야를 가리던 풀을 치워냈다. 토끼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쁜 숨을 고르는 입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여기 어디지…."

 

 

  토끼는 사라지고 없었고 우시지마는 자신이 어디로 온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토끼의 꼬리, 단지 그것을 보고 달려온 탓이었다. 자신이 달려온 길을 슬쩍 뒤돌아보아도 어딘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웬만한 풀들은 우시지마의 키와 비슷하게, 혹은 더 크게 자라있었고 나무들은 집 주변에서 보던 것보다도 높게 뻗어있었다. 부모님한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길은 모르겠다. 우시지마는 어린 나이에 겁을 집어먹고 불안해 할 만도 한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의연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우시지마의 눈이 토끼를 발견했을 때보다도 크게 뜨여졌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토끼의 털 만큼이나 하얀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려 우시지마의 뺨에도 닿아왔다.

 

 "첫 눈이다…!"

 

 

  우시지마는 여태껏 첫 눈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첫 눈은 늘 우시지마가 잠에 들어있는 새벽에 오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우시지마는 자신이 맞는 눈이 첫 눈이라는 사실에 흥분감에 얼굴이 상기됐다. 부모님도 눈을 맞고 있을까-하고 문득 생각하며 올려다 본 하늘에는, 아니, 나무 위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높다랗게 뻗어진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우시지마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그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떨어지는 눈송이에 가려 조금 희미했지만, 눈을 내리고 있었다.

 

  선녀님, 선녀님 인가봐. 우시지마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기는 토끼도 있고, 선녀님도 있구나. 그때만 해도 우시지마는 눈은 선녀님이 내리는 거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선 우시지마는 눈이 그친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있는 나무 밑 외에는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정말 선녀님이다! 우시지마는 다시금 눈이 내리는 나무 밑으로 갔다. 저기요! 우시지마가 힘껏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그 사람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우시지마는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보았다. 저기요, 선녀님! 선녀님! 그 환상 가득한 호칭에 그제서야 허공 어딘가를 보던 그 사람의 시선이 우시지마에게 닿았다. 놀란 눈동자였다.

 

 "첫 눈을 저한테 내려주시는 거죠, 선녀님!"

 "…성가시게 굴지 말고 가라, 꼬맹아."

 "고맙습니다, 선녀님! 눈 좋아해요, 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기 위해서라는 듯 우시지마는 눈송이가 날리는 나무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보였다. 우시지마가 선녀님이라 칭하는 그 남자는 뭔가 싶다가도 눈 쪼가리에 저렇게나 좋아하는 우시지마가 나름 귀엽게 느껴졌는지 눈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주었다. 내리는 눈 속에서 우시지마는 선녀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무 위에서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남자 같았다. 선녀님은 여자 아닌가? 그렇다기에는 목소리도 남자 같았고.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야 얼굴은 동화책 속의 선녀님만큼이나 아니, 더 곱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눈을 내려주는 그 아래에서 우시지마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꺼내었다. 저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예요, 선녀님! 가족들이랑 놀러왔다가 토끼를 쫓다 길을 잃었어요! 눈송이들을 얼굴에 그대로 맞으며 계속해서 남자를 올려다보던 우시지마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조금 약해진 눈발 사이로 토끼가 보였다. 분명 저가 쫓던 하얗디하얀 그 토끼였다. 전과 같이 사람마냥 우시지마를 내려다보며 토끼가 남자의 어깨 위에서 귀를 쫑긋댔다. 

 

 

 "저 토끼!"

 "얘? 얘가 예쁘긴 하지. 그래도 예쁜 것만 너무 따라다니다 이렇게 길 잃는다."

 "근데 선녀님이 더 예쁘신 걸요!"

  토끼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작게 웃음을 흘리며 토끼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주던 남자가 우시지마의 말에 조금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어린놈이 무슨. 괘씸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조그맣게 중얼 인말을 듣지 못했는지 우시지마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눈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도 예쁘고, 선녀님도 예쁘고. 신이 난 작은 발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옛다. 눈이나 실컷 맞고 가라! 남자가 나뭇가지 위에서 일어났다.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던 우시지마는 곧 눈을 감아버렸다. 

 

  감을 수밖에 없었다. 사뿐사뿐 내리던 방금까지의 눈과는 다르게 거의 눈보라 수준으로 눈이 퍼부어졌다. 눈을 꼭 감고 저의 허리 정도까지 쌓이는 눈발을 계속 맞던 우시지마가 눈이 멈추자 눈을 떠보았다. 나무 위의 남자는 사라져 있었고, 해는 밝게 떠 있었다. 우시지마는 아직까지도 차가운 눈을 만지며 고개를 이리저리 옮겨보았지만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우시지마가 왔던 길은 환하게 뚫려있었다. 길고 거친 풀들이 있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이 우시지마가 토끼를 발견한 길가가 훤히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대며 우시지마는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모님이 걱정할게 뻔했다. 감기도 들 것 같았고.

 

  그게 우시지마가 처음으로 맞은 첫 눈이었고, 제일 아름다운 눈이었다.

 

-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도 우시지마는 어릴 적 보았던 것을 잊지 못했다. 눈은 선녀님이 내려주신다는 아이 같은 동심도 함께 지우지 못했다. 한번은 중학교 때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 잔뜩 웃음만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 우시지마는 얘기를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눈을 내리는 선녀 얘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얘기까지도.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탓인지,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말수와 달리 인기는 늘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갈수록 키도 커지고 운동을 조금 했더니 몸도 좋아지고 얼굴도 잘생겨졌다. 거기다 말수가 없으니 과묵하다던가, 어른스럽다 던 가 등의 제멋대로 평이 내려지고 인기는 올라갔다. 우시지마는 저의 인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했지만.

 

  우시지마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건 고등학교 2학년 이후였고, 그 이후로 사그라들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고 심지어 대학교에 와서도 같았다. 신입생들 사이에서 큰 키는 당연히 눈에 띄었고, 잘 생긴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시지마는 1학년 때 부터 주위에 여자가 많았다. 사실, 많다 기 보다는 거느린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우시지마는 밥을 같이 먹자거나 술자리에 가자고 종종대는 여자들이 조금, 불편했다. 그런 탓에 제안은 늘 말을 돌리거나 변명을 대가며 거절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에게 이런 저런 제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2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2학년이 되자 이번에는 여자 후배들까지 합세했다. 선배들 눈치를 보는 건지 대놓고 다가와서 당당하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니었지만 옆을 빙빙 맴돌았다. 우시지마는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난감했다. 혼자 학식을 먹을까 싶어도 언제나 뒤따라오는 걸음들이 있었다. 그 날도 우시지마는 데 팔뚝을 꼬옥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선배 덕에 쩔쩔매고 있었다.

 

 

  "밥은 혼자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치만 우시지마 군 늘 혼자잖아?"

  "그…저, 혼자로 괜찮습니다."

  "예쁜 것들만 보다 길 잃을라-."

 

 

   자신보다 몇 십 센티는 작은 여자들을 내려다보다 스쳐지나가는 목소리에 우시지마가 고개를 들어보았다. 저보다는 작지만 주위의 여자들 보다는 컸다. 옅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지나갔다. 우시지마는 팔뚝을 잡고 있던 선배의 손을 정중하게 털어내고는 그 뒷통수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낯익은 목소리와 말투였다. 입학식, OT, MT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뒷통수이기도 했다. 몇 학년이지?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 맞나? 아니면 어떡하지. 갖가지 생각들을 뒤섞으며 우시지마가 다짜고짜 그 어깨를 잡았다. 

 

  "…뭐야?"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안경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얼굴은 확실했다. 우시지마의 어린 기억에 남아있는…선녀님 말이다. 저에게 첫 눈을 내려주었던. 우시지마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했다. 조금 목소리가 커진 것 같았다.

  "선녀…, 아니, 몇 학년이십니까?"

  "응? 나?"

  "예!"

  "내가 아무리 동안이어도 그렇지…교수인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남자가 들고 있던 책으로 우시지마를 아프지 않게 쳤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갈 길을 가버렸다. 우시지마는 그 뒷통수를 멍청하게 바라보다 급하게 자신을 교수라고 칭했던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이름은 시라부 켄지로. 정말 교수였다. 동안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시라부는 실제로도 다른 교수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 생명공학과 교수였다. 시라부는 어렸을 적부터 유망주였던 것 같았다. 천재라고 신문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소개가 된 모양이었고, 고등학교 조기 졸업에 대학교도 조기 입학. 석사 학위도, 박사 학위도 금세 수료했고 졸업 논문 통과는 당연한 얘기였다. 임용시험도 그간의 명성과 천재성으로 손쉽게 합격했다.

  그 이후로도 주목받는 연구와 논문들로 꽤나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교수였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결과들을 낼 수 있는지 다른 교수들은 혹시 시라부가 미래에서 왔다거나, 두 번째 삶을 사는 게 아니냐는 장난끼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시라부는 유명한 교수였다. 수업 진행력도, 얼굴도 잘났으니 강의가 인기 있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전국에서도 꽤나 유명한 교수인데 우시지마만 홀로 몰랐던 것이었다. 워낙 주위에 관심이 덜한 이유가 컸다. 

  우시지마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라부의 사진들과 자신이 마주쳤던 시라부의 얼굴, 그리고 어린 시절에 남아있는 '선녀님' 의 얼굴을 연달아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똑 닮았다. 워낙 옛날의 일이라 기억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물으면 우시지마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생생한 기억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우시지마에게는 어린 시절의 눈을 내려주던 선녀님에 대한 기억이 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와카토시 군. 이과라고, 이과?"

  "…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과학 잘 했어?"

  작게 고개를 저어보이는 우시지마의 앞에는 아이스크림을 허공에 휘적대고 있는 텐도가 있었다. 유일하게 우시지마와 오래도록 친분을 쌓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유일하게 우시지마의 선녀 얘기에 비웃지 않은 사람이겠지만. 그럼 무리야, 무리-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텐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지마는 문득 자신의 과학 성적을 떠올리다 금세 지워버렸다. 늘 잘 나오던 국어와 영어와는 다르게 수학과 과학은 늘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본인도 수학과 과학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우시지마가, 부전공으로 생명공학을 듣겠다고 선포했다. 

  그래도 부전공으로나마 강의를 듣지 않으면 시라부와 만날 일이 거의 전혀 없었다. 애초에 건물도 멀리 있고, 다짜고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큰마음 먹고 찾아간다고 해도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도 모르겠고. 학창시절 12년과 대학교 1년 동안 배운 언어들은 지금만큼은 다 쓸모가 없게 느껴졌다. 우시지마는 쥐고 있던 숟가락을 꾸욱 쥐었다. 천천히 식어가는 하이라이스를 뚫어버릴 기세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을 먹다 말고―게다가 하이라이스를―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시지마는 처음이라 텐도는 동그란 눈으로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 우시지마의 표정이 결연했다. 

  "열심히 하면 못하는 건 없겠지."

  "…아, 뭐…그렇긴 하지만."

  "응원 해 줘라."

  우시지마는 진심 인 듯 했다. 텐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원의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더 말린다고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우시지마의 의지로 가득 찬 발걸음이 힘차게 식당을 나섰다. 사실 고등학교 때 부터 우시지마는 학업에는 열심히 해왔었다. 흥미가 없다 뿐이지 소홀히 하는 과목은 없었다. 그래서 우시지마는 당당하게 부전공으로 생명공학을 신청했고, 시라부의 강의도 신청 했다. 교재도 준비하고 나름대로 예습도 해갔다. 그래도 과학이라는 학문은 아직까지 우시지마에게는 버거운 학문이었다. 

  수업을 듣는 건지 시라부를 보는 건지 살짝 헷갈릴 정도로 우시지마는 강의 내내 시라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론 수업 내용도 꼼꼼하게 받아 적고 있기는 했다. 손은 받아 적고 있었지만 머리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시라부의 얼굴만이 동동 떠다닐 뿐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나도 우시지마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기를 몇 번, 우시지마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시라부에게 다가섰다. 시라부 주변에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우시지마는 학생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서 멀거니 학생들과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않던 우시지마는 학생들이 모두 흩어지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시라부를 붙잡았다.

  "교수님, 저 15학번 문창과 우시지마 와카토시 입니다."

  "…문창과?"

  "부전공으로 교수님 강의 듣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문과면서 생물? …과학 좋아해?"

  "……토, 토끼는 좋아합니다."

  토끼? 우시지마의 대답에 시라부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학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탓에 엉뚱한 대답을 툭 내뱉어버렸다. 우시지마는 의아한 표정의 시라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한 학생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뒷수습을 어찌 해야 할 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아서 우시지마는 잠자코 시라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덩치에 안 맞게. 시라부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최악의 반응은 아니다 싶어 우시지마는 한결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시라부가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나 토끼 기르는데. 보여줄까?"

-

  생명공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건 정말 잘 한 일이라고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텐도의 걱정과는 달리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게 받고 있었고, 수업을 따라가는 데에도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원체 우시지마가 머리가 좋은 덕분이긴 했다만. 그리고 제일 잘 했다고 느끼는 점은 시라부와 한층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학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토끼를 좋아한다는 개연성 없는 대답을 했었지만, 그게 오히려 인연의 시발점이 된 느낌이었다. 시라부는 실제로 토끼를 여러 마리 기르고 있었다. 우시지마가 혹시 실험에 쓰시는 겁니까? 하고 조심스레 물어오자 시라부는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하기야 토끼를 보는 눈빛이나 만지는 손길을 보면 정말 반려 동물로 기르는 것 같았다. 

 

  토끼 좋아한댔지?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 다시금 물었다. 우시지마는 확실히 대답을 했고, 그 이후로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기르는 토끼의 밥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토끼의 밥을 사오는 일을 하거나, 밥을 챙겨야 할 시간인데 시라부가 시간이 안 나면 우시지마가 주는 일을 했다. 어째 우시지마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토끼를 돌보면서 시라부와 꽤나 친해졌고 말이다. 

  "얘는 와카토시."

  "예?"

  "다른 토끼랑 좀 많이 다르거든."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새까만 털이 반지르르 빛나는 토끼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으며 시라부가 작게 웃어보였다. 우시지마는 그런 시라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옛날에 마주쳤던 선녀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똑같았다. 생긴 것부터 행동이나 말 하는 것 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거나 만난 건 아니지만 그랬다. 우시지마는 홀로 시라부는 자신이 만났던 선녀와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차마 시라부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점점 가을은 짙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법한 날씨였다. 맑은 날은 적어졌고, 가끔은 비도 왔다. 이쯤 되면 첫 눈이 올 때도 됐는데. 우시지마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이 올 것 같진 않은 날씨였다. 어릴 적 선녀의 어깨에 있던 토끼만큼이나 하얀 토끼에게 당근을 주며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은 언제 내려주실 겁니까?"

  "내가 신이냐. 그런 건 기상캐스터한테 물어 봐."

  "눈은 선녀님이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너는 대학생이 돼서 그런 걸 믿냐."

  "제가 봤으니까요. 선…교수님이 눈을 내려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시라부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일어났다. 우시지마가 일어나는 시라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벗어두었던 안경을 쓰는 시라부는 나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다음 강의가 있을 시간이었다. 발표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우시지마도 덩달아 일어났다. 토끼 밥 마저 주고 가도 돼. 외투를 입으며 시라부가 열쇠를 우시지마에게 주었다. 학생에게 함부로 열쇠까지 주다니. 조금 무신경 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니 그건 조금 기뻤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받아들었다. 

  시라부를 보내고 우시지마는 다시 토끼 앞에서 멀거니 앉아있었다. 당근을 오물대는 하얀 토끼가 왠지 시라부를 떠올리게 했다. 그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자신도 나갈 채비를 했다. 돌아가서 자신도 저녁이나 챙겨 먹어야겠다 생각한 참이었다. 물은 충분한지, 밥도 넉넉하게 있는지 다시금 확인한 우시지마는 문도 단단히 잠구었다. 

  "어라, 와카토시 군?"

  "아. 오랜만이군."

  "그러게. 생명공학은 괜찮아?"

  "나름 잘 된다."

  텐도였다. 텐도의 말 대로 간만이긴 했다. 전공에 부전공에, 토끼를 돌보거나 시라부의 잔심부름을 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우연이긴 했지만 만난 김에 둘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시지마는 혼자 먹는 것 보다는 낫겠거니 싶었다. 텐도가 이끄는 대로 근처의 음식집에 앉자 늘 그랬듯이 대화는 텐도로부터 시작됐다. 주로 부전공에 대한 얘기였다. 하기야 질문이 많은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문과의 길만을 걸어오던 우시지마가 부전공으로 생명공학을 선택한건 텐도에게 있어서도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으니. 

  우시지마는 모든 질문에 솔직했다. 내용은 열심히 하면 따라갈 만하고, 가끔은 힘들지만 시라부 교수님과 가까워졌으니 괜찮다고. 텐도는 묘한 눈으로 우시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인가 시켜놓은 술이 텐도가 든 잔에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텐도의 몸이 우시지마에게 조금 더 가까이 기울었다.

  "근데 와카토시 군, 와카토시 군 기억의 선녀는 대체 어떤 존재야?"

  "…어떤 존재라니?"

  "생김새나 말투가 닮았다는 이유로 그 교수님을 그렇게 잘 따르는 거. 뭐랄까…첫사랑 같잖아?"

  "첫사랑? 누구 말하는 거지? 시라부 교수?"

  우시지마의 말 뒤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식당 안의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텐도는 기울었던 몸을 다시 뒤로 뺐다. 와카토시 군, 그 눈치로 어떻게 알아봤는지 의문이네. 장난스런 웃음을 섞으며 텐도가 중얼거렸다. 우시지마는 텐도의 말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살짝 고개를 갸웃댔다. 됐어, 됐어. 넉살좋게 웃으며 텐도가 우시지마의 잔 끝에 제 잔을 부딪쳤다. 우시지마는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텐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잔을 기울였다. 바빴던 일상에서 간만에 넘어가는 술이었다. 

  기분 좋게 한두 잔 기울이던 술잔이 늘어났다. 우시지마는 몸에 조금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만 마셔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이 들 때, 텐도도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제안해왔다. 우시지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라며 흐느적대는 텐도의 손에 저도 손을 흔들어주곤 우시지마는 멀리 있지 않은 제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코올 탓인지 조금 가볍고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도어락을 누르는 손가락도 느릿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우시지마는 노곤한 제 몸을 대충 뉘였다. 아침에 개고가지 않은 이불이 온 몸을 감싸는 착각이 일어 잠이 몰려왔다. 

  볼 위가 간질댔다. 우시지마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았다. 아, 꿈이구나. 싶었다. 하얀 토끼와 까만 토끼가 가득 우시지마의 곁에 있었다. 최근 토끼 돌보는데 혈안이 되어있어서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우시지마가 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토끼들은 우시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고 우시지마의 몸 위에서 그 작은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왠지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된 우시지마는 조심스레 토끼들의 털을 매만져 주었다. 

  "너, 꼬맹이."

  우시지마의 눈이 커졌다. 토끼들 사이에 시라부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시지마가 어릴 적 보았던 그 선녀 그대로의 시라부가 있었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 조금 더 다가가려 했지만 자신의 몸 위의 솜뭉치들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토끼의 숫자는 왠지 갈수록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 다가가는 걸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앉아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뭔가 여러 가지 헷갈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뭘 말입니까?"

  "알 턱이 있나……."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와카토시 찾으면 여러 가지 알려줄게."

  와카토시? 우시지마는 의아한 눈길로 시라부를 바라보다 까만 토끼를 떠올렸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다른 토끼들과는 조금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라부가 붙인 이름이었다. 그렇긴 그랬는데…. 우시지마가 저의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토끼와 까만 토끼들이 이리저리 섞여있었다. 게다가 많았다. 하얀 토끼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까만 토끼들이 적은 게 아니었다. 시라부가 다른 토끼들과 다르다고는 했지만 생김새가 다른 것도 아니라서, 우시지마는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토끼들을 둘러보았다. 

  까만 토끼들 여러 마리가 우시지마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자신의 주먹만 한 토끼들이 가득했다. 몸 위로 올라오기도 하고, 주위를 콩콩대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다 같은 토끼였다. 우시지마는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몇 마리 토끼들을 골라서 보여 보기도 했지만 시라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힌트. 와카토시는 밥도 잘 먹고, 건강하고. 날 엄청 좋아하고."

  그런 걸로 알아내란 말이야?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힌트를 들어도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손에 당근이든 뭐든 들려있는 게 아니었으니 밥을 잘 먹는 건 알 턱이 없었다. 주위에 있는 토끼들은 모두 건강해보였고, 모두 제 곁에 몰려있어서 특히나 시라부를 좋아하는 토끼가 어떤 토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난히 털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힌트 아닌 힌트를 되새겨보았다. 밥을 잘 먹고, 건강하고, 시라부를 좋아하고….

  "그거 저 아닙니까?"

  "……."

  "……."

  "너 나 좋아해?"

  눈이 번쩍 뜨였다. 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토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구겨진 이불뿐이었다. 우시지마는 멍청하게 앉아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꿈인데도 너무 생생했다. 토끼의 털이 닿던 감각도, 시라부가 보이고 들리던 감각도. 그 시라부가 저가 어릴 적 만났던 선녀 그 자체인지, 지금의 교수 시라부인지, 혹은 동일인물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뇌리를 맴돌았다. 텐도의 말까지 뒤섞여 토끼마냥 통통 튀어 다녔다. 

  첫사랑 같잖아?

-

  기분이 묘했다. 기분은 묘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우시지마는 평소처럼 전공이든 부전공이든 열심이었고, 토끼를 돌보는 것도 열심이었다. 여전히 가슴께가 간질대는듯하기도 했지만 우시지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한 꿈을 꾸고, 텐도가 괜한 말을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텐도의 말 대로 어떻게 스친 것만으로도 시라부가 그 옛날의 선녀와 닮았다고 알아챈 건지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우시지마는 눈치도 없었고 둔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렴풋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은 느꼈다. 시라부를 바라볼 때에 느껴지는 것들이라거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던가. 첫사랑 같은 거창한 단어를 쓰기에는 낯간지럽지만 시라부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것은 조금 알 수 있었다. 그 좋아하는 감정이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 또한 말이다. 우시지마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도 큰 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우시지마, 오늘 저녁에 바빠?"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 그럼."

  애매한 말 끝. 시라부는 바짝 젖히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툼한 종이들이 묶인 것들을 팔락이며 시라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종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토끼를 바라보던 눈을 돌려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아. 확실히 달라졌구나. 우시지마가 물끄러미 시라부를 눈에 담다 고개를 돌렸다. 시라부가 달라진 건 없었지만 우시지마 자신이 달라진 건 느껴졌다. 토끼들이 바쁘게 우시지마가 주는 먹이를 먹고 있었다. 혹시나 시라부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동심의 설렘에서 나오는 감정의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선녀는 산타나 치아요정 같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꿈같은 존재이니.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 졸업까지는 시간도 남았고, 토끼들을 위해 준비한 밥들도 많이 있었다.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되겠지. 우시지마는 홀로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가지런하게 빛을 내는 토끼들의 털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우시지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라부는 여전히 안경을 쓴 채 종이들을 넘기고 있었다. 인상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우시지마가 책상 위를 채우고 있는 너저분한 종이들을 모아 정리했다. 그런 우시지마에게 짧게 시선을 주던 시라부가 제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시간 괜찮으면 이거 정리 좀 해줘."

  "늘 하던 대로 괜찮습니까?"

  외투를 챙겨 입으며 시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을 주머니에 넣으며 바쁜 걸음으로 시라부가 문을 열고 나갔다. 멀어져가는 코트 끝자락 까지 쫓았다. 시라부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우시지마는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시라부는 최근 들어 꽤나 바쁜 것 같았다. 바쁜 것 같은 게 아니고 실제로 바쁜 것이었지만. 새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있고,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시라부는 주목받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오늘 우시지마에게 저녁에 시간이 있냐고 묻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시라부는 강의 외에 스케줄이 있는 날에는 꼭 우시지마를 불렀다.

  부른다고 해도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서 시라부의 푸념과 불평을 듣는 것 뿐 이었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의 불평에 고개를 꼬박꼬박 끄덕이며 잔을 기울였다. 평소와 사뭇 다른 심통이 잔뜩 난 시라부의 목소리는 나름 좋은 안주였다. 책상 위를 가득 채운 종이무더기를 보아하니 오늘은 꽤나 오래 잡혀있지 않을까 싶었다. 우시지마는 시라부와 지내는 시간을 쌓아가며 사소한 것 까지 알게 되었다. 그건 기쁜 일이었다.

  종이들을 정리하고 시라부가 앉아있던 의자 위에서 얕게 잠이 들었다. 이상한 꿈을 꾼 뒤로 꿈을 꾸는 일이 적어졌다. 이번에도 그랬다. 시라부가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에 얕은 잠은 쉽게 깨버렸다. 어느 정도 선명해지는 정신에 우시지마가 고개를 들어보았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아있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는 시라부가 보였다. 오늘 귀가는 늦어지겠구나. 우시지마의 시선이 시계에 한번 닿았다가 멀어졌다. 가자. 

  "아,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어! 나보다 나이도 많고, 해온 것도 많은 건 알겠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들으셨길래 그러십니까."

  "다 말하기도 벅차! 지금 내가 젊다고 무시 하는 거야, 아니면 질투 하는 거야?"

  그 낡아빠진 가치관 좀 내다버리라고! 쾅.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시라부가 불평을 토해냈다. 확실히 평소보다도 조금 더 높은 목소리였다. 얼굴도 살짝 발갛게 색이 들어 있었다. 시라부는 젊지만 능력 있었고, 잔뜩 주목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더 시달린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시라부가 자리에 앉아 저녁 메뉴와 동시에 술을 시킨 게 그 증거가 되었다.

  "그래도…뭐. 얘기 들어주는 사람 하나 생긴 건 생각보다 좋네."

  "친구 없습니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여기."

  시라부의 잔은 금세 비워졌다. 우시지마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시라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시지마의 시선을 느낀 시라부는 왜 쳐다보냐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고향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아온 시라부다. 당연히 그릇에 맞는 교육을 받기 위해 고향을 뜨고 좋은 곳에 왔을 것이고. 우시지마는 문득 시라부 홀로 대학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왔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인기는 있어 보이지만 자신처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럼 처음이구나. 시라부가 누군가를 믿어서 열쇠를 내어주고, 속 얘기를 꺼내고. 시시콜콜한 얘기도, 불평도 편하게 얘기하는 사람. 우시지마는 조금, 기뻤다. 우시지마에게 있어 시라부는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시라부에게 우시지마는 어떨지 몰랐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묘한 설렘이 가슴 깊숙한 곳부터 기분 좋게 벅차올랐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 어느 정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 우시지마는 기뻤다. 일렁이는 가슴이 나쁘지 않았다. 동심의 설렘에서 나오는 감정이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우시지마는 생각보다 결론을 빨리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새겨져서 그런 걸까. 우시지마의 시선이 술잔을 흔들어대는 시라부에게 끊임없이 맞닿아 있었다. 

  "너도 친구는 별로 없어 보이던데."

  조금 새는 발음이었다. 술잔을 든 손가락으로 우시지마를 가리키며 시라부가 말했다. 우시지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가 대답이 없음에도 시라부는 큰 불평은 하지 않았다. 친구 없는 사람끼리 잘 지내는거지이. 시라부의 고개가 폭 숙여졌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우시지마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 감정을 깨닫게 되고. 서투르고 느린 우시지마에게 있어서 생소하지만 기분 좋은 감정이었다.

  기분 좋은 감정. 이 감정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나? 우시지마는 문득 작은 의문이 들었다. 우시지마는 깊게 생각을 잇지는 못했다. 그저 시라부를 좋아하고, 시라부를 향한 감정을 깨달았고, 그것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멈추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았다. 우시지마 답다고 한다면 답다고 할 수 있었다. 

  시라부의 잔은 금세 비워져 있었다. 병도 말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평소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었다. 시라부는 빈 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끼니를 챙길 목적으로 시킨 음식들도 다 먹은 지 오래였다. 우시지마가 시라부의 눈을 마주보았다. 말없이 그 시선을 받아내던 시라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그랬다. 우시지마도 따라서 일어났다. 

  "피곤하냐. 오래 안 잡을게."

  "……."

  "그 노인네들이 히스테리만 좀 덜 부렸어도!"

  "오래 잡고 있으셔도 됩니다."

  아. 자꾸 새어나가 버린다. 우시지마의 말에 앞서가던 시라부가 돌아보았다. 흐린 날씨에 뽀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조금씩 새어나가는 마음을 어떻게 두어야할까.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할까, 막아야 할까. 여러 생각을 했지만 사실 우시지마는 막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마음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을까. 우시지마는 조금씩 흐르던 마음을 그대로 흐르게 두는 것 혹은 모든 마음을 내보이는 것 정도밖에 알 수 없었다. 

  "오래 잡고, 하고픈 말 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

  "좋아합니다.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옛날부터."

  우시지마는 저의 마음을 결국 드러내보였다. 어릴 적 처음 만났던 작은 동경과 동심. 그것에서 시작되었던 마음과 사소한 관심이었다. 그저 환상 같은 동심, 그 마음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동심에 그려진 선녀님이든, 그 선녀님을 닮은 시라부이든, 그저 대학 교수 시라부 켄지로이든. 특별한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뽀얗게 입김만 흘려대던 시라부의 얼굴이 별안간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오히려 포근한 날씨였다.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솔직한 마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에 발간색만 칠해내고 있었다. 얼굴에 더 이상 색을 물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하나 둘 떨어졌다. 아침부터 흐린 빛을 보이던 하늘은 결국 눈송이를 떨구었다. 우시지마는 제 코 끝에 차가운 눈송이가 닿았다 녹아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눈앞의 시라부의 얼굴은 붉었으며, 불쾌한 표정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졌다. 점점 더 굵어지는 눈 사이로 우시지마의 하얀 미소가 밝게 번졌다.

  "이것 보십시오. 저는 교수님이 눈을 내려주실 줄 알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핀잔을 주었어야할 시라부의 목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이 얇게 흩날리던 눈송이들은 점점 굵어지다 함박눈이 되어 내려왔다. 흐렸던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갔다. 굵어진 눈발 사이로 여전히 발간 시라부의 얼굴이 보였다. 둘 사이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세상은 자꾸만, 자꾸만 하얗게 덮여갔고 시라부의 얼굴은 본래의 색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었다. 시라부의 얼굴이 가라앉게 되고, 우시지마의 투명한 마음에 답을 할 수 있을 때쯤에나 눈이 그칠 것 같았다. 그런, 날이었다.

월간 우백 첫 호에 참여할수 있어 영광입니다! 열어주신 주최자님, 참여해주신 저를 제외한 존잘님들, 월간 우백을 기대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8ㅅ8 캐붕대잔치에 부족한 글이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 월간 우백의 모든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 Twitter Clean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