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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Nez.

​리호

Le Nez(르 네)
1. 프랑스어로 코(nose)라는 뜻.
2. 조향사perfumer를 가리키는 표현.

 

 

#. Top note


  “...로마시대 폭군의 대명사인 네로 황제는 당시 중동에서 10년간 생산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향료를 애첩의 장례를 치르는 단 하루만에 다 써버렸다.”  

 

  탁상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들었다. 타카시마高嶋에게서 온 라인Line 여러 개과 부재중 전화 3건을 알리는 빨간 점들로 빼곡한 스마트폰 덕분에 완벽하게 현실로 돌아왔고 네로 황제가 죽은 애인의 장례식에 사용한 향료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 여유 따위는  사라졌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향기. 네로의 사랑은 예찬으로 끝났지만 지금부터 끝을 맞이하는 나의 연애에는 어떤 향기를 전해야 할지.

 

 


-*-*-*-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새벽 두시 반에 택시에 올라탔다. 새벽의 우울에는 익숙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백미러를 쳐다보지도 않고 록본기六本木의 클럽 이름을 대자 운전수는 대뜸 “젊음이 좋지요.”라며 사람 속 모르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면 애인을 데리러 가시나?”

  “헤어지러 가는 길이에요.”

 


  처음 만났던 날, 애인의 손에서는 향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서양인들이 상상하는 이국의 불교사찰 건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덥고 톡 쏘는 향기가 올라오는 향수였다. L사의 KAMA다. 그는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을 어떤 영화의 주인공만큼 내뱉는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격투기 선수생활을 했다는 애인과는 게이 데이팅 앱(TOP.D)에서 만났다. 나는 프로필을 수정하면서 특이사항에 [대행 아르바이트 하고 있음.] 이라고 분명히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결국에는 그는 내가 고객의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클럽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미나는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그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 당신이 그랬잖아, 링 위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실례라며.

 

  특수한 운동을 하는 사람의 폭력은 가중 처벌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자니 술에 취한 주먹에도 나가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맞게 되자 클럽 관리인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직접 애인을 나에게서 떼어 놓고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가드에게 안기는 꼴로 싸움이 마무리 되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단단한 팔과 넓은 흉부에 안기는 감촉이 나쁘지는 않았다. 

 


  “손님, 병원에 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정중하게 물어온다. 가드라기보다는 관리자 같다고 생각을 고치고 있는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가져도 된다고 했다. 직업병이긴 하지만 나는 사람을 브랜드 향수로 라벨링해서 기억하거나 떠오르는 이미지를 향기로 기억하는 편이다. 하지만 재차 정신을 집중해보아도 이 사람과는 아무것도 매칭 시킬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보호색과 같은 행동이었다. 당신도 언젠가 기억 속에서 라벨링 되어 사라지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어.

 

 

 

 

-*-*-*-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연애와 양립하기 어려운 직업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긴자의 호스티스 출신이었다. 우리는 히로오広尾의 맨션에서 단둘이 생활했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남자보다는 자기만의 향기가 나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했던 어머니는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날엔 C사의 CHANCE를 뿌렸다. ‘기회’ 라는 의미였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즐겨 뿌리던 향수처럼 매주 토요일에 찾아오던 남자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증발해버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전문학교의 조향사 과정을 수료했는데 학비가 턱없이 비쌌다. 졸업을 1년을 남겨두고 휴학을 했다. 마침 기업에서 조향사로 근무하던 대학 선배가 얼마 전 독립해서 조향공방을 열었는데 지금은 거기서 목, 금, 토요일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바에서 알음알음으로 연인을 대행하는 일을 했다. 애인과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연애와 양립하기에는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내 시향지 위에 물음표를 남겼던 남자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2주 후였다. 지인을 통해 새로운 대행 건수를 소개 받았다. 진짜 애인이 있는데 감추고 싶다고. 직업은 밝히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흑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계약기간은 우선 4개월. 자세한 얘기는 직접만나서.]라는 전언이 전부였다. 세상에 남자애인이 필요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가보다.

 

 

 

 

 

 

 


#. Middle note

 

 

 

 

 

 

 

 

목요일 저녁이었다. 공방은 7시쯤 문을 닫는데 6시 40분 쯤 커다란 그림자가 공방 문을 밀고 들어왔다. “도와드릴까요?”라고 상투적으로 건넨 응대에 남자는 숙면에 도움이 되는 아로마 오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라벤더와 일랑일랑을 약간 배합한 오일을 추천해주었다. 이윽고 계산대 앞에 서서야 어렵게 “시라부 켄지로白布 賢二郎씨 ”라고 내 이름을 불렀다. 
어차피 손님도 없었으므로 일찍 문을 닫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조향공방 근처에 노부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데 카페라기보다는 찻집에 가까웠다. 흡연이 당연히 가능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

 

 

 

 

 

 

  “그날도 시라부 씨를 알고 있었어요.”

 

  “아, 그날은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해요.”

  “아니요,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좋아하는 영화 같은 거 있나요? 들으셨겠지만 저는 프로라서 말씀하시면 원하는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 해 드려요.”

  “영화는 잘 안보는 편이라서”

  “전혀?”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 미안해요. 흡연자?”

  불을 붙여버리고 나서 담배를 피우냐고 물어보다니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최악이었다. 하지만 내 후각으로 판단할 때 이 사람은 나와 같은 부류가 확실했다. 카페에 앉자마자 받은 명함을 테이블 오른쪽 상단에 올려두고 이름을 확인한다. 우시지마 와카토시牛島若利. 대기업 상무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흑사회에서 흔히들 쓰는 수법이다. 외관은 멀쩡한 기업체로 위장한다. 

 


  “네.”

  짧게 대답한 우시지마는 베스트까지 챙긴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안 주머니에서 만년필대신 리볼버가 나오는 게 아닐까, 흥미진진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죽장갑을 벗지 않은 채 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딸깍-소리와 함께 라이터의 불이 켜졌다가 꺼지고 다시 지포 라이터의 뚜껑이 내려가는 순간, 내 심장과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행성이 충돌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저는 어렸을 때 렛미인Let me in 이라는 영화를 보고 뱀파이어가 되어서 저만의 친구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마음 속 안으로 들어간다거나 비밀을 공유하며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 로맨틱하지 않아요?”  

 


  “ 그렇군요. 감수성이 풍부하시네요.”

 

  “……. 우시지마 씨는 대체 어떻게 살아 온 거죠?”

 

  “…….어렸을 때 잠시 미국에 있었어요.”

  음, 그걸 묻는 건 아니었는데.

 

 

  “좋아하는 향은?”

 

  “향수는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 추천해주신 라벤더 오일은 좋네요.”

 

  “애인이 뿌려줬으면 하는 것도 없어요?”

 “…….달콤한 향?”

 

 


-*-*-*-

 

 

 

 

 


    다음에 만날 때 손수건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카페를 나와 교차로를 걸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우시지마에게 팔짱을 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에 조금은 상처를 받았다. “본인이 대행을 부탁하시고 놀라면 제가 무안해서 어떻게 합니까?” 라며 영업용 미소를 싱긋 흘려보내자 그제야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연인을 연기하는 것은 다음 주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라인 메신저를 사용하니 폰 메일은 쓸 일이 없다. 그래서 통신사는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우시지마는 Docomo였고 나는 au였다. 맡고 싶은 향에서 달콤한 향이라고 대답했지만 내가 평소 선호하는 중성적인 향이라면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 정도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디 계열이나 은은한 머스크 향을 좋아한다. 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혼자서라도 극장을 찾지만 그는 영화를 전혀 보지 않는다. 이번 의뢰는 서로가 살아온 방식을 하나하나 뜯어 고쳐야 하는 각본이었다.

 


-*-*-*-

 

 

 

 

 

 

 

 

  우리는 매주 목요일에 내가 조향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1-2시간씩 시간을 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정말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서. 주로 내가 영화 이야기나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으면 우시지마가 맞장구를 쳐주는 식이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토호TOHO 시네마에서 상영하는 도쿄영화제 상영작들을 보러 다녀왔다. 우시지마를 만날 때 나는 그가 처음에 말했던 달콤한 향을 의식해서 P사의 candy나 V사의 너티 앨리스를 뿌려보기도 했다. 

 

  “오늘 향수에 신경 썼는데.” 라고 말하면 그는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딸기 사탕 냄새가 나요. 으깬 것...”

 

  “……. 진짜 애인 있는 거 맞아요? 연애 해 본 거 맞아요?”

 

  내 타박에 묘하게 얼굴 근육이 풀어질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라는 듯 마중 나와 있는 우시지마의 왼쪽 팔에 파고들어 길을 걷는 것이 이제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공방에 올 때마다 라벤더 베이스의 아로마 오일을 구입했고 나는 그동안 누군가의 향기를 연기해야 했기에 새로운 조향 작업은 뒤로 밀어두었다.

 

 

 

 

#. Base note

 

 

 

 

 

 

 

 

 

  “제가 서비스를 받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설거지를 위해 두르고 있던 에이프런을 벗으며 우시지마가 말했다.

  “미안, 그냥 화대라고 생각해요.”
  농담인데 단어 선택이 심기에 거슬렸을까. 하지만 우시지마는 감정에 동요가 생길 때마다 눈썹을 꿈틀거렸고 그 변화는 3개월 가까이 지켜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어쨌든 지금 그의 눈썹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처음 그의 집에 오게 된 것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에 당한 린치 때문이었다. 팔뚝에 스치듯 가벼운 생채기가 생겼다. 운동신경이 나쁜 편이 아니라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마침 순찰 중이던 동네 방범대원 할아버지가 호각을 불며 쫓아와 주셨다. 우시지마가 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연기를 제대로 했나보다. 달려들면서 '우시지마에게 안부전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너무 삼류 영화에 나오는 상황이라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상대는 이번에 우시지마의 애인에게 위협을 주는 정도로만 끝내기로 했고 그것을 만족스럽게 성공했다고 믿고 있었나본데, 나는 애초에 계약 조건에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한다는 안내는 받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그대로 혼자 집에 가기에는 꺼림칙했다. 대충 응급처치를 끝내고 카페로 들어가 전화를 했다. 30분도 안되어서 달려온 우시지마를 보자마자 “이 카페도 당신 구역이에요?” 라고 쏘아 붙였더니 그는 고민하는 듯 하다가 당분간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

 

 

 

 

 

 

 

  조수석에 앉아 23구에서 점점 외곽으로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시끄럽거나 더러워도 신주쿠와 같은 곳이 아니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나는 뼛속부터 도시 남자인데. 어색한 공기에 못 견디겠다 싶을 때 쯤,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유명인 들이 살 것 같은 맨션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운전자의 시큐리티 체크를 거쳐야만 통과 할 수 있는 진입로를 지나고 지문 인식 기능이 탑재된 건물 입구의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고 나서야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눈빛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속눈썹을 내리깔았을 때 이미 그의 혀가 내 안을 부드럽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시지마에게 닿을 때마다 이 사람은 온몸이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손을 잡을 땐 손끝에 박인 굳은살을 내가 만지작만지작 거리면 뚱한 표정을 짓곤 하는데 입술만큼은 그 어떤 곳 보다 부드러웠다. 
치열을 탐색하던 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타액이 섞이는 조용한 리듬이 투박한 공간을 메워갔다. 감시카메라에 오디오 녹음 기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딴 생각을 하는 걸 들켜버렸는지 우시지마는 집중하라는 듯이 입술을 떼어서 내 목덜미에 가져갔다가 귓불을 스치며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딸기맛” 

 

  우시지마의 속삭임과 동시에 17층에 도착했다. 

 


  우시지마의 집은 예상외로 깔끔했다. 한 번에 집안일을 몰아서 하는 나와는 다르게 바지런히 청소를 하고 클리닝 가게에 들렀다. 처음 집에 간 날, 침대 맡에는 공방에서 구입한 아로마 오일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라벨마다 날짜가 적혀져 있어서 그 사람과 카페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침실은 온통 라벤더 향으로 가득했다.

 


  그의 집에서 살게 된 다음날은 쇼핑을 했다. 피부에 직접 닿는 것은 내가 쓰던 것을 쓰고 싶어서 입욕제와 샴푸를 마음대로 사왔다. 욕실에 그가 쓰던 액상 샴푸 옆에 고체 타입의 헤어샴푸 바bar를 두었는데 그 다음날부터는 그에게도 내가 사용하는 무라사키 쇼크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같은 향기를 풍긴다. 그때만큼은 마치 우리도 보통의 연인들과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시향지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 Trail **

  그 사람의 맨션에서 살게 된지 3주정도 되었고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드는 사이가 되었다. 같이 사는 동안 우시지마가 경미한 부상을 입어 내가 구급상자를 들고 허둥지둥 했던 일들이 있고 나서는 그가 무사히 들어오는 얼굴만 바라봐도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다.  


  “오늘은 늦었네요.”

 

  “네, 와인 마실래요?”

 

  “좋아요.” 나는 아로마 램프에 불을 붙였고 우시지마는 와인을 잔에 따라 침대 맡으로 가져왔다.

 

  “어렸을 때 얘기 했던가요?”

 

  “미국에 있었을 때?”

 

  “네, 나는 현지인 학교를 다녔어요. 끝나고는 주짓수랑 유도 같은 운동을 했어요. 좀 더 커서는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지금 하는 일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쪽과 관련 된 거라서. 데릴사위로 들어온 아버지는 결국 떠나셨죠.”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지금도 미국에 계세요.”

 

  “그렇구나.

 

  “그래서 저는 말을 하거나 켄지로씨처럼 향기를 표현하는 것은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몸으로는 먼저 알 수 있지만.”

 

  “그래요? 그럼 저는요? 저는 어땠어요?”

 

  “지켜주고 싶어요.”

 

  “요즘 시대에 그런 대사는 너무 90년대 제이팝j-pop 가사 같아서 구닥다리 같은데”

 

  “보수에 생명수당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계약기간동안은 다치지 않게 지켜줄게요.”

 

  “……. 진짜 애인은 지방에 잘 있나요?”

 


  내 물음에 우시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아마도”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각본이 정해진 연애를 하고 있었다. 자기는 표현이 서툴다고 했지만 나는 우시지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독님, 우리 아직 시나리오 중간에 있는데요?”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

 

  “ 첫날 물어봤죠, 무슨 영화 좋아하는지.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생각해 봤는데 어릴 때 봤던 홍콩 영화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 영화 주인공이 이중 스파이인데 자기가 결국엔 경찰인지 갱인지 헷갈리고 애인한테도 마지막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요.”

 

  “…….다행이네요, 저도 그 영화 본 적 있어요.”

 

  “제가 시라부 씨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각본을 부탁했던 의뢰인인지 헷갈립니다.”

 

  “….그런데 로맨스 영화 아니잖아요. 그거.”

 

 

 

  침묵이 이어지자 우시지마는 조금 망설이더니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착수하게 될 일에 커다란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고, 좋지 않은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우면 자기가 따로 마련한 곳이 있으니 그곳에서라도 잠시 지내면 어떨지 물어왔다. 우리의 계약기간은 아직 2주가 남아있었다. 그를 붙잡아 둘 논리적인 이유가 그 다음부터는 떠오르지 않았다. 

 

 

 

 


-*-*-*-

 

 

 

 


  새벽에 현관을 나섰다. 침실에서 마지막으로 느낀 라벤더 향에서 그라스Grasse의 라벤더 밭이 떠올랐다. 시향지가 완성되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육지에 존재하는 바다처럼 진한 보랏빛을 뽐내는 라벤더 밭의 향기를 닮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떠올릴수록 그리운 향기였다. 나는 그대로 숨이 막혀서 질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철을 타고 1달 가까이 방치해 둔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JR로 갈아타기 위해 걸어가는 계단을 보자마자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자 텁텁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야 하는 데 바닥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겨울의 도쿄는 실외 보다 실내가 더 추웠다. 집안의 싸늘한 냉기에 방금 내가 실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별 앞에서 무자비한 연애들을 반복해왔지만 우시지마처럼 헤어짐까지 다정한 사람이 다시 있을까. 다정한 것이 지나치면 무정한 상처로 돌아온 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나는 적어도 ‘다음 사람에게는 잘해주라’는 말을 하는 연인은 아니지. 적어도 당신에게 만큼은.

 

 

 

 


-*-*-*-

 

 

 

 

 

 

  돌아와서는 조향공방에 나가는 요일을 늘렸다. 일주일에 4번으로. 그리고 그의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시지마의 주소로 택배를 부치기로 했다. 내용물은 한참동안 만들지 않았던 시그니처 향수였다. 다행히 향료를 고르고 배합을 생각하는 동안은 슬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포장을 마치고 택배회사 직원에게 건네면서 끝까지 메시지는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향기.’라고 써 내려갔다. 이틀정도 지나 택배회사에서 [배달완료]라는 문자안내를 받았지만 우시지마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계절에 따라 향기를 갈아입는 것처럼 우리의 계약 기간이 만료일을 맞이했다. 나는 한 적도 없는 사랑의 끝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연말에는 향수 D. I. Y를 위해 공방을 찾는 손님이 많아 바쁘게 지나갔다. 기업에서 진행하는 프로모션 프로젝트 2건도 동시에 진행해야 했기에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 해年가 바뀌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올해에는 학교로 복학할 생각이었다. 연기 따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시라부켄지로로 돌아갈 것이다. 신정(正月)이 지나고 다시 근무를 시작했다. 이제 나는 목요일에 의미 부여하기를 포기했다. 공방 근처의 카페에도 가지 않는다. 주인아주머니께서 “함께 오던 미남은 어떻게 되었냐?”라기에 그냥 웃어 보이고 말았다. 대신 카페에 들릴 일이 있으면 좀 더 먼 거리에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로 간다. 거기는 모든 좌석이 금연이다.

 

 

-*-*-*-

 

 

 

 


  손님이 오지 않는 공방에서 달력을 보고 있었는데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딱히 일정이랄 것도 없었다. 자주 놀러가던 바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어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매주 돌아오는 목요일, 그날도 공평하게 새카만 밤하늘에 손톱 같은 달이 떴다. ‘우리, 일단은 같은 하늘 아래에 있나?’ 실없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끝나도 이성보다 감정이 밀려오는 스스로에게 자기혐오가 밀려와서 신경질적으로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향공방 건물과 바로 옆 건물 사이 골목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점점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우리 계약기간 끝났어요. 지금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놀라서 미처 불을 붙이지 못한 새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다. 다짜고짜 뒤에서 파고드는 것은 반칙이다. 상대가 우시지마 와카토시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보고 싶었어요.”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다치지는 않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치사하네.” 코끝이 찡해져왔다.

  “미안해요.”

  “뭐가요”

  “…….켄지로 씨 우리 정말로 연애 해 볼래요?”

  “…….”

  “사실 당신이랑 같이 살게 되었을 쯤에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숨겨두었던 애인을 말하는 건가. 우시지마의 애인 얘기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럴 땐 키스해줘요”

  목덜미를 파고드는 우시지마의 더운 숨결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직접 만들었던 향수라 탑노트부터 베이스노트까지 향료를 줄줄이 외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키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창백한 달빛과 피부로 느껴지는 겨울의 회색빛 공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우시지마의 체온과 숨결이었다. 그리움의 무게만큼이나 진한 키스가 이어지는 내내 둘만의 시공간에 갇힌 듯 했다. 하지만 길 위에서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이성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이윽고 ‘내 혀는 당신이 묶어야 할 체리꼭지가 아니에요.’라는 말이 머릿속을 지배하며 전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타임아웃을 외치기 위해 우시지마의 가슴을 조금 세게 토닥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 카페 갈래요?"

 

  "아니, 피곤해요. 우시지마 씨 집에 갈래요."

 

  ‘그 다음은 집에서 하고 싶어요.’ 라는 마음이 전해진 것 일까. 우리는 마주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깍지 낀 손을 우시지마가 자기 호주머니로 가져갔다. 마주 잡은 손에서 보랏빛 물결이 쏟아지는 듯 한 착각을 느꼈다.

 

 


fin.

 

 

*인용: 몽키 텍스트,『SCENT』,몽키 텍스트(2015),p.146
**Trail: (발향 단계에 의한 분류법에서 말하는) 향수를 뿌린 후에 지속되는 향의 여운

월간우백 창간호에 참가하게 되어 기쁩니다. 시라부의 1인칭 시점에서 쓰는 글은 처음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만 골라 다루다보니 분량도 조금은 길어진 감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월간우백 오래오래 계속 만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월간 우백의 모든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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