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피에 젖은 첫눈은
아름답다
Vender
전광판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 일본 배구 계의 유망주이자 청소년 국가대표였던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자살,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나? "
원래 전광판은 곧 쓸데없는 광고들을 흘려 보내는 전깃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피에 젖은 첫 눈은 아름답다.
전광판에서 그렇게 그의 소식이 들린 후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처럼 지치지도 않고 그를 언급하며 각자의 반응을 이야기했다. 어린 청년이 불쌍하구만. 하며 혀를 차는 사람, 진짜 멋있었는데, 나는 스파이크를 그렇게 치는 사람은 처음 봤었어! 하며 그의 과거를 떠올리는 사람. 인구 수가 많은 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골라잡듯이 했다. 그렇게 가십거리가 될 것이란걸 우시지마는 알고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죽음을 시라부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정하기 싫었다. 마치 짜여진 각본같았다. 그렇게 유서 한 장 없이 죽었을리가 없었다. 그럴리가···없는데. 매일매일 부정하며 사는 건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정속의 진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때의 공포와 두려움만이 자신을 맞이할 뿐이었다. 공허함이 자신을 몇 번이고 집어삼킬까 두려워 시라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우시지마의 이름을 불러댔다. 아마도 이름 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것이라 시라부는 단언할 수 있었다.
모두 우시지마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때 시라부 혼자서는 방대한 물음들을 품고 있었다. 혹시 타살이 아닌가요, 그가 평소 연락하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할 말이 파도만큼 넘쳐 나열하자면 무한대가 될 것 같아, 몇 개만 추려 시라부는 일단 담당 경찰관에게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시라부는 물을 것을 정리해둔 수첩과 펜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우시지마와 함께 맞췄던 코트를 걸치고서 경찰서로 향했다. 미야기에서 수사인력이 가장 많은 경찰서였다.
경찰서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경찰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또한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는 사람들. 아예 의자를 침대삼아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 다행히 자신은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저 지경까지는 안가서 다행이라고 시라부는 내심 안도했다.
" 여기 그, 우시지마 와카토시 자살건 담당 경찰관님이 누구신가요? 물을 것이 있어서. "
"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전화 좀 받겠습니다. "
" 네, 수고하세요. "
시라부는 전화를 급히 받는 경찰관을 지나쳐 안내해준 '저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서 안은 붐볐지만 조용히 자신의 물음에 답해줄 경찰관을 눈으로 빠르게 좇았다. 아마도 파일을 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리번 거렸지만 모두들 전광판과 같은 부류인 컴퓨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젠 파일은 그만 볼 때인가-싶어 일단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경찰관에게 물었다.
" 우시지마 와카토시.. "
저 쪽으로 가시면 돼요. 시라부는 내심 믿었던 경찰관에게서 심드렁한 대답을 받았다. 이 곳에 와서 벌써 2번째 듣고 있는 대답이었다. 반복되는 대답에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경찰관이 이상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라부는 무엇이라도 얻어가야 했기 때문에 경찰관이 별 의미없이 가리킨 것 같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역시나 똑같이 물어보았지만 같은 대답을 받았다. 시라부는 모두 회피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길래 떠넘기고 말아버리는 것인지. 남의 일이라고 이렇게 어중이떠중이로 하는 것은 자신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경찰서를 나와, 시라부는 이 상황에서 제일 현명한 생각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시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비밀, 그것은 바로 시간여행이었다. 시라부는 일생 중 3번을 원하는 이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다만 과거를 본다고 해서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비유를 하자면 정원에 들리는 정도의 시간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 시간여행이라는 큰 비밀을 실행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는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을 지 모른다고, 직감했다.
먼저 자신이 향한 과거는 우시지마와 함께 있었던 날 중 이상하다고 느꼈던 날이였다. 여느 날과 같이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우시지마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시라부는 급한 일이겠거니, 하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시라부는 1시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온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 곧바로 연락해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대답은 그저 급한 일이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갔다고, 미안하다고만 할 뿐이지 그 급한 일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시라부는 자신에게까지 숨길 정도면 얼마나 급한 것일지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저 가정사이겠거니-싶어 더 물을 것을 그만 두었다.
자신의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니 괜스레 후회만 증폭되어 왔다. 그 때 물을 것을, 왜 그랬는지 속절없이 눈물만 떨어질 뿐이었다. 이젠 닦아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니 더 처량하게 울었다. 최대한 그에 대한 미련과 후회를 털어낼 수 있도록. 시라부는 자꾸만 아려 고통스러운 가슴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슬픔을 덜어냈다. 내가 안고 갈 수 있는 정도의 슬픔만 남기를 기원하며.
***
마음을 추스르고, 시라부는 곧바로 다음 날로 넘어갔다. 그 날은 절대 그럴 리 없던 일이 벌어졌던 날이었다. 우시지마의 얼굴 몇 몇 곳에 상처가 나있었고, 운동복 또한 군데군데 무언가 때 묻은 흔적들이 있었다. 분명 시라부와 학교 정문에서 만나기로 약속 했었지만, 우시지마는 30분을 더 지나고서 만신창이인 상태로 나타났다. 시라부가 우시지마 선배-! 하고 부르니 그제서야 우시지마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 선배! 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치고 오신거에요! "
" 걱정 마라, 그저 넘어진 것 뿐이니. "
" 넘어졌는데 얼굴에 이렇게 상처가 많은 거면 얼마나 심하게 넘어지신거에요! 치료해야 하는데, 선배. 양호실로 빨리··· "
" 괜찮대도. 네가 걱정하면 더 아플 것 같은데 말이다. 곧 저녁 때니 어서 식사하러 가는게 좋지 않겠나. "
"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
" 배고파서 걸어갈 힘도 없구나. 아- 배고프다, 시라부. "
되도 않는 딴청을 피우며 먼저 걸어가버린 우시지마에게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던 때였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 숨기고 하고 싶어하는지 그 땐 짐작하지 못했었다. 그저 배고프다고 먼저 앞서 가버린 우시지마의 뒤를 따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시라부는 우시지마와 함께 걸으며 나름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했는지 하는 말마다 교묘하게 피해갈 뿐이었다. 그렇게 현재의 시라부가 과거의 시라부와 우시지마를 보는 동안 하나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우시지마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라는 점. 평소 자신에게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까지 숨길 정도면 아주 큰 비밀일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리고 결론까지 얻은 지금, 여기서 과거의 우시지마를 더 보면 가슴께가 욱신거려 보는 것 조차 힘들 것 같았다. 결국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자신의 과거 속에 두고 현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과거와 현실을 드나들기를 몇 번, 그 사이에 시간은 주책없이 흘러갔고, 금새 일주일이 지나게 되었다. 시라부는 그 사이에 살이 빠지게 되었고, 안 그래도 마르던 몸은 마르다 못해 앙상해지게 되었다. 시라부를 챙기려 집에 들린 카와니시가 오랜만에 본 시라부를 보고 경악하며 이야기했다.
" 야! 시라부 켄지로! 너 제정신이야? 대체 밥을 먹고 다니는 건 맞아? 혹시나 해서 반찬거리들 사갖고 오긴 했는데··· ···. 진짜 너 심각하구나. 아직도 우시지마 선배 못 잊고 이러는 거면... "
" 함부로 이야기 하지마. 안그래도 예민하니까. 밥은 거기다 두고 가고. 말 예쁘게 안나와서 미안.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카와니시, 내가 이렇게 피폐하게 살 줄은 몰랐는데... "
" 이 멍청아, 이제 그만 힘들어할 때도 되지 않았냐.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인데. 이제 그만 잊고···"
" 어떻게 잊어, 그 사람을. 분명 이건 자살이 아니야. 분명해. "
" 야, 너 병원가야 되는 거 아냐? 심각한데... "
" 됐어. 혼자 해결할 테니까 이만 가봐도 돼. 식사 챙겨준 건 고맙다. "
" 너도 참 독종이다. 그럼 간다. "
자신을 챙기러 온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한 것은 있지만, 시라부는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우시지마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기정사실화 한 셈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는 왜 전적으로 그를 믿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만 의심 했으면, 내가 우시지마 선배를 살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시지마의 억울함을 알았으니 시라부는 후회를 조금은 덜은 듯 했다. 자신과 우시지마가 함께했던 기억 중 행복한 기억만 남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시라부는 두 번째 시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우시지마의 과거를 향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완전한 관찰자가 되어 우시지마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분명하게 단서가 남아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시라부는 옷깃을 여몄다.
과거로 향하는 길은 빛과 같은 속도로 지나갔다. 눈 한 번 깜빡하면 눈 앞에 있을 내 사람. 그리고 한정된 시간 속에서 만질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그렇다고 미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 이 상황은 시라부를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음으로써 그립고, 보고싶은 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상황은 더욱 시라부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지금이 그랬다. 우시지마의 과거에서, 우시지마는 방에 홀로 앉아 핸드폰을 잡고 서툰 손놀림으로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시라부, 할 말이
시라부, 네게 전할 말이
시라부...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은 터치 몇 번으로 그렇게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보는 내내 먹먹해진 가슴이 자꾸 울었다. 왜 그랬느냐고, 왜, 왜. 괴로워 미어지는 감정이 자꾸만 시라부를 괴롭혔다.
핸드폰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더 답답했다. 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너무도 어려웠다. 시험의 4점짜리 문제보다, 홀로 낭떠러지에 있는 것 보다 어려운 숙제였다. 꼭 에베레스트 산 마냥 너무도 높아보여서, 시라부는 엄두 조차 못낼 것 같았다.
포기해야 할까.
자꾸만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나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니, 여기서 포기하면 자신이 그동안 얻어온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젠 자신을 위해서도, 우시지마를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살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라부는 마지막 시간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
시라부는 마지막 시간여행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부모님께 편지를 써두기로 했다. 카와니시네 집에서 며칠 밤만 자고 오겠다고, 이유는 적지 않고 간단하게 할 말만 적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시라부는 괜한 긴장감이 들어 자꾸만 주먹을 쥔 손에 땀이 났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하며 시라부는 눈을 감고 우시지마와의 기억을 회상했다. 손을 잡고 걷고 있던 날, 추운 날 따뜻한 손난로를 함께 잡고 웃던 날, 벚꽃이 아름다운 날에 함께했던 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라부와 우시지마. 기억을 천천히 더듬는 일은 얇은 상처를 조금씩 뜯어내는 것 처럼 따가웠고, 슬펐다. 이제 더 흘릴 눈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과거만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시라부였다.
더 이상 약해져서는 안돼. 하고 우시지마와의 기억으로 단단히 마음을 다 잡은 시라부는 자신과 우시지마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로 향했다.
***
그 날은 가을의 낙엽이 어울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재즈 풍의 음악이 흐르고, 적은 사람들이 소소한 담화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작은 책장이 있었고, 잔잔한 커피향이 기분좋게 코 끝을 울렸다. 우시지마는 검은색 폴라티와 슬랙스를 입고 베이지색 코트를 걸쳤었다. 손목에는 시라부가 사준 시계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언제든 멋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이 시각에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멋져서 벙찐 얼굴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라부.
시라부?
" 네? "
"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 건가. "
" 아, 우시지마 선배가 너무 잘생기셔서요. "
" 그렇게 멍 때릴 정도로 잘생긴거라면 안 잘생긴 걸로 하겠다. "
" 왜요? "
" 안 잘생기다면 멍 때리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것 아닌가. 시간이 아깝다. "
" 그래도 잘 생긴건 변함 없네요. 선배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뭐라도 사올게요. "
" 아메리카노 부탁한다. 따뜻하게. "
" 주문하고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기다리고 계세요! "
" 그래. 천천히 다녀와라. "
그리고 시라부는 곧장 주문을 위해 자리를 떴었다. 그래서 현재의 시라부는 놓쳤던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시라부가 자리를 떠나는 동안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벗어놓은 코트에 무언가를 넣어놓았던 것이었다. 작은 지퍼백에 담긴 편지와 유에스비는 꽁꽁 싸매져 시라부의 코트 안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들킬새라 우시지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았고, 과거의 시라부는 그렇게 모른 채 우시지마와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전혀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시지마에게만 자살이 아닐 것이라는 증거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절대 자신이 가지고 있을리가, 없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시라부는 급히 현재로 들어와 그 날에 입었던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여전히 그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있었다. 우시지마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긴 살아있는 증거가. 흔적과 마주하자 처음으로 시라부는 소리내어 울었다. 왜 이리 선배는 제 가슴에 사무치는 걸까요. 눈에서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안도의 눈물을 계속해서 흘렸다.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남겨놓은 증거물을 끌어안고 한참을 통곡했다. 가슴께가 다시 욱신거렸다. 연속해서 나오는 눈물에 헐떡이자 폐에서는 산소를 계속해서 찾았다. 그렇게 하루를 바다로 만들었다. 소금기가 담긴 눈물로.
***
자꾸만 눈물을 흘려서 눈가가 발갛게 해진 시라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퍼백의 유에스비를 꺼내 컴퓨터에 연결시켰다. 연결된 파일엔 N스폰서라는 이름의 파일이 들어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시라부가 클릭하자, 여러 음성파일들이 자리해 있었다. 날짜별로 정리된 음성파일은 10개가 조금 안되었다. 시라부는 이어폰을 꽂고 음성파일을 하나하나씩 들었다. 처음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우시지마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첫 마디는 살려주세요. 였다.
그자리에서 시라부는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선배의 목소리인데, 어째서 하는 말은 전혀 아닌가. 떨려 진정이 되지 않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겨우 잡아 진정시키고, 음성 파일을 계속해서 들었다.
음성파일은 처음 자신의 과거를 갔던 날의 날짜로 저장되어 있었다.
' 내가 언제 오라고 했지, 우시지마 군? '
' 30분 전 입니다. '
' 근데 왜 말을 못 알아먹어. '
그리고 뒤이어 맞는 소리가 들렸다.
' 우리 고객 중 VIP인거 몰라? '
' 죄송합니다. '
한 번 더 맞는 소리가 들렸다.
' 너는 그 얼굴로 여기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돼. 사장님이 착하셔서 다행이지. '
' 죄송합니다. '
' 알았으면 꺼져. '
첫 번째 음성파일이 끝나고 연속해서 두 번째 음성파일이 재생되었다. 두 번째 자신의 과거로 갔던 날짜로 저장되어 있는 파일이었다.
' 제가 잘 하겠습니다, 제발 멈춰주세요. '
' 그러면 자꾸 튀면 안되지. 꿇어. '
뒤 이어 또 맞는 소리가 들렸다.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우시지마의 울음섞인 목소리만 가득한 음성파일이었다.
듣는 내내 시라부는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왜 늦게 오냐며 투정을 부렸던 자신을 끝없이 원망했다. 듣는 내내 눈물을 많이 흘려서 탈수증상이 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곧 속이 더부룩해져 곧장 화장실로 향해야했다. 선배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다니. 워낙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겸비하다 보니, 우시지마를 탐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감독님이 골라준 스폰서로 선택한게 바로 N스폰서였다. 우시지마가 이 이야기를 해줬던게 몇 달 전이었는데, 믿었던 곳에서 우시지마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고, 그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면 얼마나 하등하게 대했다는 걸까. 음성파일의 재생을 멈추고 시라부는 지퍼백에 함께 있던 종이를 펼쳐보았다. 종이에는 시라부가 가장 좋아하는 우시지마의 글씨가 정갈하게 적혀있었다.
시라부.
나다. 너의 애인이자, 시라토리자와교 배구부의 주장인 와카토시.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네가 세상에 꼭 알려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N스폰서로부터 지속적인 폭력을 당해왔다. 심지어는 접대까지... 시키려고 했었다. 부모님께는 말씀을 하지 못하고 혼자 앓다가 이건 아니겠다 싶어 너에게 편지를 남긴다.
...사랑한다.
이 말, 많이 이야기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예전에도.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임이니까. 그래서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한다. 부디 이 유에스비를 경찰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N스폰서의 비리가 담긴 파일이니, 꼭 잘 간수하길 바라고.
이런 선택을 해서 미안하다. 살고 싶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편지를 읽어내려갈 때마다 눈물에 종이의 잉크가 번졌다. 툭, 투둑- 하고 쉴새없이 장마처럼, 소나기처럼 세차게 눈물이 내렸다. 언제쯤 그만 울 수 있을까요, 우시지마 상. 갈 길 없이 떠도는 시라부의 독백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
시라부는 그 뒤로 피폐한 삶을 살았다. 우시지마의 유언대로 경찰에게 증거를 전해 언론에 퍼뜨려짐으로써 N스폰서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시라부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쉴 곳도 없이 앞만 달려온 시라부에겐 막 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쓸쓸함과 공허함만이 남아있었다.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결국 고통만이 남은 채로 시라부는 그렇게 두 계절을 지나 겨울을 맞이했다.
겨울은 시라부에게 의미있는 계절이었다. 우시지마와 함께 미래를 약속했던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눈을 같이 맞자던 우시지마는 없었고, 홀로 시라부만 남아있었다.
첫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틀 전이었다. 시라부의 생기없던 눈에 그나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시지마는 없더라도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혼자라도 첫 눈을 맞기 위해 시라부는 우시지마와 맞췄던 코트를 입었다. 함께 맞춘 시계도, 장갑도. 그리고 이틀 후인 오늘은 첫 눈이 오는 날이었다.
첫 눈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해가 뜨기 전 새벽, 푸르스름한 하늘은 눈을 뱉어냈다. 서서히 굵어지는 눈은 아스팔트 바닥에 몸을 뉘여 녹아져 갔다.
이제 정말 첫 눈이 오는구나.
시라부는 우시지마와의 기억을 담고 문을 나섰다. 지금 시각은 새벽 3시 40분. 아직 오늘이 된지 3시간이 넘어가는 지금. 시라부는 멍하니 눈이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예쁘다. 첫 눈. 우시지마 상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 첫 눈 같이 맞자면서요. 같이 보기로 약속했었잖아요. ... 그래도 전 약속 지켰어요. ... 있죠, 이제 저는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시지마 상, 사랑해요.
시라부는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어둠을 담은 리볼버는 여린 빛을 타고 반짝였다. 시라부는 총구를 이마에 댔다. 철컥-하고 총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낭만적인 이 분위기와 맞지는 않았지만, 시라부는 만족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이뤘다. 우시지마와의 연애도, 죽음의 진실도, 약속도. 이제는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시라부는 가만히 감았던 눈을 떠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해요.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시라부는 힘없이 아스팔트 바닥에 뉘여진 눈처럼 쓰러졌다. 총알이 관자놀이에 박히는 순간, 우시지마의 살려주세요- 하는 음성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시라부가 그렇게 죽고 주위 사람들은 무척 안타까워했다. 우시지마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결국은 따라갔구나. 그 동안 고생많았다.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세터로써도 고생많았고. 카와니시의 낮은 목소리가 납골당에 울려퍼졌다. 시라부, 거기선 행복해라. 세미의 말을 마지막으로 배구부는 돌아갔고, 시라부의 유골함은 홀로 남겨져 있게 되었다.
세미와 카와니시가 떠난 뒤, 곧이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어두운 색으로 무장한 남자가 시라부의 유골함 앞에 섰다. 고개를 든 남자는 시라부- 시라부-하고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보고싶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켄지로.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 홀연히 돌아가버렸다. 남자는 납골당을 빠져나가 곧 멀리 떠났고, 그 뒤로는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END.
부족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월간 우시시라 1월 호를 빛낼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월간 우시시라 많이 사랑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