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비와 빛
비타
내가 7살이 되던 때에, 언젠가부터 그 사람은 비가 올때마다 찾아왔다. 노란 우비를 입고 장화 끝으로 물장난을 치고 있으면 웅덩이에 그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 사람은 나보다 몇 배는 키가 더 컸으며 항상 파라솔같이 넓적한 검은 우산을 쓰고 나를 한 손으로 들어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긴 내가 노란 유치원모자를 쓰고 그를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거친 조각상이 생각났다. 그래서 대리석같이 반들반들한 그의 피부를 만지고 있으면 그가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진 느낌에 고개를 홱 돌려 우산으로 반쯤 덮힌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하늘은 회색빛이였다. 나는 혹시 우리가 행선지에서 벗어날까 기대했지만 그는 묵묵히 나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내리기 싫어 발버둥치는 나를 억지로 세워두고서 그는 머리를 세 번 쓰다듬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것이 비가 오고 있는 이 회색 풍경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아홉 살 때, 그 사람은 여전히 비가 올때마다 찾아왔다. 2년전처럼 그는 여전히 파라솔같은 우산을 쓰고 비가 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안아올려 듬직한 제 품으로 당겼다. 2년 전과 달라진거라면 내 키가 10cm나 컸다는 사실과, 몸무게가 조금 더 늘었다는 사실인데 그는 개의치 않은지 나를 불쑥 들어올린다. 가끔보면 그는 철인같기도 하다.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내가 아저씨. 하고 물으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예전에는 쳐다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는데, 이제는 익숙해진건지 그를 빤히 바라보고있다.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왜 대답 안해줘요! 하고 심술을 부리자 전처럼 묵묵히 앞을 보고 걷는다. 뾰루퉁해진 내가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있자 그는 아무말도 않고있다. 팔을 내리려는 손길에 깜빡 잠이 든 내가 깨자 그는 나를 내려놓고 머리를 세 번 쓰다듬는다. 내가 왜 하필 세 번 쓰다듬는거냐고 물으려 하자 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늘따라 부연 안개가 그를 숨겨버렸다.
14살, 그 사람과 만난지 7년이 되고 있던 때였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나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내가 거부하는 바람에 그는 내 손을 잡고 가는 걸로 바꿔주었다. 나를 감싸안는 손이 넓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손을 직접 잡아보자 내 생각보다 훨씬 크고 투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굳은살이 굉장히 많아서 툭툭 건드리자 그는 말 없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끄러워져 나는 조용히 집으로 가야했다. 예전의 나처럼 말을 아무렇게나 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필 지금이 가장 숫기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사람도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왠지 집으로 향하는 길의 정적이 낯설게 느껴졌다. 쭈뼛대며 그에게 손을 흔들자, 그 사람은 내가 봤던 미소중 제일 조용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의 손인사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져 나는 들고 있던 실내화주머니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17살이 되고 맞은 두 번째 달에, 곧 졸업을 하고 고교생이 되는 나는 여전히 졸업식에서 여느 아이들처럼 부모님을 찾기위해 눈을 바삐 굴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 사람이 와있지는 않을까 함께 찾아봤지만 그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은 날 발견하고 손을 크게 흔들어댔지만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다시 앞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에 걸맞게 비가 내렸어야했는데. 밖은 쨍쨍하다. 겨울인데. 나는 그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우울한 날에는 비가 최곤데. 터덜거리며 걷던 얇게 눈이 쌓인 초록색 잔디에 검은색 그림자가 들어섰다. 마침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있던 나는 혹시나 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내 그림자였나. 나는 더욱 실망에 가득찬 마음을 하고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아직 중학교 생활이 더 좋아서 그러는거냐고 물었다. 나는 질문에 그 사람이 보고싶어서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입을 굳게 다무는 걸로 대신했다.
쨍쨍한 겨울의 졸업식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2달이 흘렀다. 적당한 성적과 적당한 친구들을 만들었고 나는 다른 세계에 보기 좋게 융화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적당한 지금에 빠지는 게 하나 있다면 그 사람이 언젠가부터 오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졸업식 이후로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비가 오면 그는 검은 우산을 쓰고 늘 나를 제 품으로 안아올려 주었는데. 이제는 홀로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도 이번 달은 모의고사나, 시험은 없었지만 유달리 행사가 많았다. 비가와서 그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하늘은 귀를 닫고있는지 비가 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에도 그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다. 습한 공기와 찝찝한 몸의 온도에 우울해지는 날이 많아지자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방학에는 늘 꿈에 나타나서 검은 우산을 쓰고 나와 함께 걷는 그를 보았다.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키가 멀대처럼 큰 덕분에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일이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주는 꿈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그 사람은 내가 17살이 되고 12월의 어느 날에 찾아왔다. 눈이 아닌 비가 내렸고 나는 여전히 그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는 내가 생각한 모습 그대로 검은 우산을 쓰고, 비가 내리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잘 지냈나. 그를 만나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는 그 한 마디를 기준으로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벌써 고2나 되는 내가 7살의 감성으로 돌아가 울음보가 터지자 그는 말 없이 나를 감싸안아 내 등을 토닥였다.
눈물에 먹혀 흐물거리는 발음들을 그는 신기하게도 모두 알아들었다.
" 왜, 비가 올때마다 안 왔어요? 내가 안보고 싶었어요? 내 졸업식 때도 안오고, 꽃다발 받고 싶었었단 말이에요. 아저씨 나쁜 사람. "
"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너에게는. "
" 왜? 왜 나한테만인데요? "
" 언젠가 네가 알게되겠지. 그럼 이만. "
아, 아저씨! 그는 내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고 나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는 나와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가 검은 인영으로 사라질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어야했다. 그 사람은 10년 전의 모습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왔고, 웃는 표정이 아닌 비가 내리는 표정으로 내게 왔다. 그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반들반들한 피부결이였다. 무의식적으로 뻗으려던 손을 의식이 막아준 덕에 오랜만에 만난 그 사람에게 실례는 면한 셈이었다.
그 사람은 다음 날에 찾아와서는 내게 포스트잇 하나를 주고 갔다. 주소가 적혀있는 메모였는데,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내 손에 포스트잇을 쥐어주고 재빠르게 발길을 돌리는 바람에 나는 또 멍하니 서있어야했다.
다음날, 나는 휴대폰과 포스트잇을 번갈아가며 메모되어있는 주소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했다. 솔직히 주소를 알려준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찾아오라는 의미는 맞는 것 같아서 찾아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주위 사람에게 묻고 물어 가까운 파출소로 향했다. 순경은 주소를 검색해보더니 없는 주소라며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에, 다시 한 번 검색해보라며 말해보았지만 역시나 없는 주소라고 결국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순경은 다시 적어오라고 말하며 파출소의 문을 닫았다. 그럴리가 없는데. 결국 나는 우리집과 가까운 동네라고 얕본 덕에 길을 잃는 결과를 안게 된것이었다. 그치만, 겨우 20분 거리인걸. 그렇게 그 사람을 원망하며 걷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다. 죄송합니, 고개를 올리자 그 사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저씨?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왜 이상한 주소 주세요? 그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는 나를 지나쳐 앞으로 천천히 뛰어갔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나는 어떻게든 답을 얻기 위해 함께 뛰었다. 아, 아저씨! 왜 사람 말하는데 먼저 가요!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뛰자 말을 건네는 나의 숨이 벅차기 시작했다. 아저, 씨 왜 그 동안 안오다가, 왔, 어요?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저씨! 이름도 안 알려, 주셨잖아요! 내가 고함치자 그 사람은 대뜸 걸음을 멈추었다. 급제동이 걸린 자동차처럼 반동에 의해 넘어질 뻔한 나를 한 손으로 잡아주어 일으켜주고는 그는 내게 말했다.
"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지금은 운동 중이라 끝나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
" 아, 우시지마 씨! "
아저씨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데요! 하면서도 괜시리 웃음이 나는 덕에 삐거덕거리는 다리를 애써 무시하고 그와 걸음을 맞춰 뛰었다. 그 사람은 평소에도 자주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왠지 운동복 차림이 잘 어울려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항상 검은 양복차림의 그에게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는 모퉁이를 돌고 얼마 안 있어 걸음을 멈췄다. 꽤 높아보이는 아파트의 정문 앞에 서서, 호 수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기에 나도 함께 들어갔더니, 그는 딱히 나를 제재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보이진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탄 나와 우시지마 씨는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실은 나만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식은 땀이 나는 것에 괜히 손으로 부채질도 해봤다가 걸치고 온 후드집업을 허리에도 묶고 푸르기를 2번.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기에 왠지 심술이 나서 아저씨네 집에 갈거에요. 라고 하자 오는 게 아니었나. 하며 11층입니다. 하고 열리는 문과 함께 나가버리는 탓에 나는 당당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는 진짜 별로야. 별로야! 미워! 괜히 어린 애처럼 주의를 끌려 모진 말을 해도 그는 묵묵히 비밀번호를 누를 뿐이었다. 4자리의 비밀번호가 터치되고 문이 열림으로써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사람의 집은 드라마에 나오는 집처럼 모던하고, 심플한 스타일의 모델하우스를 본떠 만든 것처럼 보였다. 모든 물건들이 각에 맞춰 정리되어 있었으며 하나라도 궤도에서 벗어난 것들이 없었다. 우와-하는 입모양으로 그를 보자 그는 곧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 같았다. 괜히 홧홧해진 얼굴에 뒤로 돌자 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탓에 내 행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실의 소파에 마주앉은 우리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굉장히 호기심, 궁금한 게 가득 담긴 얼굴로 여러가지 질문을 보내봤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 우시지마 와카토시 씨. 이제 대답해주실 때도 됐잖아요? "
" ... ... "
" 7살때부터 비가 올 때마다 저를 데리러 온 이유는 뭐고, 왜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는지 말씀해주시라구요. "
" 네 부모의 지시였다. 네가 비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나는 언제나 비가 오는 날에 너를 데리러 나갔던 거였고 사라졌다 나타난 건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너는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텐데. "
" 18살이나 된 사람이 얼마나 이해력이 딸린다고. "
" 알다시피, 내가 늘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내 집이 부유해보이는 이유도. 한 조직의 보스라는 정도만 알아둬라. 네 부모님은 나의 부모님과 오래된 친우사이고, 나는 지시에 따라 너를 지켜왔을 뿐이다. "
" 아저씨, 진짜 내 졸업식에 안왔어요? "
잠잠히 듣던 시라부가 토끼같은 눈으로 우시지마에게 물었다. 사실 그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지난 2년간 제일 궁금했던 건 그 그림자가 자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제일 궁금했었다. 시라부가 그의 시선에 피하지 않고 마주치자 그는 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 갔었지, 그래도 내가 지키는 아이가 벌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간다는데.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
" 굳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지 않아도 됐는데. 저, 아저씨 엄청 기다렸다고요. 졸업식에서도 아저씨만 찾았고. 꽃다발도 안줬잖아요. 부모님이 저보고 아직도 중학교에 머물러 있고 싶은 거냐고 했지만 속마음은 아저씨를 못봐서라고 대답하고 싶었다고요. 왜 얼굴 안비췄어요? 네? "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은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년이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그동안의 자신과 물음이 잔뜩 베어있는 대답을 하자 우시지마는 퍽 난감해졌다. 자신은 그저 지키는 의무만 있을 뿐 졸업 축하까지 하라는 의무는 없었다. 사실 졸업식에 찾아간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라 빠져나오는데 꽤 애를 먹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사정이 있다며 나오려는 저를 굳이 캐물어내려는 텐도의 붙잡는 손길을 무마하는데 꽤 힘들었다는 걸 시라부는 모르고 있어야 했다. 자신은 그저 지켜주는 정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네가 졸업하는 걸 봤으면 됐다. 이제 내가 지키지 않아도 너는 이미 많이 자랐다고 생각한다만. "
" 그래서 이제 저랑 영영 안 보실 생각인가보네요? 그 쪽 말하는 걸로 봐서는. "
" 시라부. "
" 우시지마 와카토시 씨. 그렇게 마음대로 인간관계 결정짓는 거 아니에요. 언제나 나만 갈망했고 기다린 관계를 이렇게 멋대로 끝낼수는 없거든요? 이제부터 당신이 겪을 차례일거에요. 이미 눈치챘거든. 당신도 나를 궁금해하고 있잖아. "
순식간에 뒤엎어진 판도를 다시 엎기에는 우시지마의 머리로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많이 자랐구나. 하는 정도에 머물러있을 뿐이었었는데. 귀신같이 눈치챈 시라부를 칭찬해야할지, 그게 아니라며 변명해야할지 꽤 고민이 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 시라부.
나 아저씨네 집에서 자고 갈거에요. 칫솔은 새거 주세요.
정말 대범한 아이였다. 제 집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고. 사실은 네가 걷고 있는 바닥도 온통 칼과 총 더미들인걸 모를 터였다. 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너를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시라부에게 말하지 않으면 모를, 반드시 숨겨야하는 사실이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우시지마에게 침대에 베개를 비스듬히 세워 누워있던 시라부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 아저씨 몇 살? "
" 말이 짧다. "
" 몇 살이세요? "
" 서른. "
그러고보면 아저씨 진짜 안늙네요. 동안이신가? 칭찬인가. 뭐, 칭찬일 수도 있고~ 저 잘거니까 말걸지 마세요. 네가 먼저 말, 드르렁. 자는 소리를 입으로 내는 사람이 어디있어. 푸흐, 진짜 잘께요. 잘자요 우시지마 씨.
시라부는 정말 잠든 것인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고 우시지마도 곧 수면에 취해갔다. 딱딱한 마루바닥이 폭신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자 제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 먼저 자신을 맞이했다. 이건 필시 하이라이스다. 우시지마는 눈을 번쩍 뜨고 부엌으로 걸어나갔다. 어디서 찾은것인지 앞치마를 두른 시라부가 일어나셨어요? 하며 따끈한 밥에 하이라이스 소스를 올려 식탁에 올려두었다. 한지 얼마 안된 것인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걸.
아저씨 이거 좋아하세요? 우리 어머니도 이거 잘 드시길래, 그냥 생각나서 해봤는데.
맛있다. 요리를 잘 하는 편인가보군.
나름요.
곧 제 그릇도 들고온 시라부가 한 숟가락 뜬 채로 우시지마에게 물었다. 근데 아저씨 저기 총은,
푸흡,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우시지마의 입에 있던 밥알들이 입 속을 뛰쳐나와 식탁에 안착했다. 아, 뭐에요 아저씨! 시라부가 질색을 한 얼굴로 휴지를 건네주기에 우시지마는 입가를 닦고 곧 식탁의 제 잔해들을 닦아치웠다.
" 언제 본거야. "
" 재료 찾다가 봤어요. 원래 총기 소지하면 안돼잖아요~. 근데 아저씨가 보스라고 했으니까 이해해드릴게요. 멋있네요, 보스. "
" 절대 건들지 마라, 시라부. 네가 다시는 보지도 말고, 건들지도 말아야할게 칼과 총이다. ... 권력에 물들어지는 순간 너를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 "
" 잃었어요, 아저씨도? "
" ? "
" 아저씨도 자신을 잃었냐고요. "
" 그건 아니지만, 예전의 나와는 꽤 멀어졌다. "
예전의 아저씨는 어땠는데요? 여전히 잘생겼었나? 그 때도 하이라이스 좋아했어요? 우리 엄마아빠 연애하고 있던 시절인가?
너무 많이 갔는데.
말해줘요, 아저씨의 모든 게 궁금해. 기다린 시간만큼 궁금하다고요.
" 별 거 없다. 지금보다 좀 더 앳될 뿐이지. "
" 나도 별 거 없었는데. 아, 아저씨 근데 왜 머리 세 번씩 쓰다듬어줬어요? 나 예전에 물어보려다 까먹어서. "
" 잘, 자라주었구나, 시라부. "
" 네? "
" 한 번 쓰다듬을 때마다 내 말이 담겨있는 의미였다. "
들고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라부가 성큼성큼 우시지마에게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시라부가 오는대로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우시지마가 제 앞에 온 시라부에 맞춰 시선도 멈추었다.
" 제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보실래요? "
" ? "
" 저 되게 힘들게 살았는데, 모르셨죠? 아저씨가 자꾸 제 마음에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름방학만 되면 비가 지겹게도 내리는 바람에 괜한 기대를 몇 번씩 저버리고 말았던 저를 모르시겠죠. 아저씨는 머저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
" 시라부. "
" 그래서 총을 보고 잠깐 가만히 있다가, 방아쇠 당겨봤는데 총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알고 그러신건가 싶기도 하고. "
" 아까도 말했지만 총과 칼, 권력은 네가 물들어서는 안돼. 이 세계에 네가 발을 들이면 너를 잃는다고 했다. "
" 아저씨 있으면 저는 괜찮아요. 이제 기다리는 거 지쳤다고. 언제까지 울면서 보고싶다고 해야하는데요? 못놔. 내가 당신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
우시지마는 곧 일어서 시라부의 머리채를 잡고는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뭐하는건데요! 소리치는 시라부의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문을 열고 밖으로 내보냈다. 쾅쾅쾅, 하고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열어! 문 열라고요! 하는 시라부의 목소리에 말을 거둘 생각이 없다면 널 거둘 생각도 없다. 하며 우시지마는 부엌으로 돌아가 차게 식은 하이라이스를 크게 한 입에 삼켜버렸다. 식어도 맛있다고 생각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오늘따라 맛이 없었다. 제 접시와 함께 제 앞에 있는 하이라이스도 모두 버려버렸다. 희망을 주어서는 안되었다. 이미 이 곳은 빛을 잃은 세계다. 여태껏 보아왔던 중 제일 빛나는 사람은 오직 시라부 켄지로뿐이었다. 눈 앞에 두고 꺼져가는 빛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한 조직의 보스면서도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문을 두들기며 소리치던 시라부는 어느샌가 잠잠해졌고 우시지마는 혹시 집에 돌아갔나 싶어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문을 열자 개미처럼 달려드는 시라부에 몸의 균형을 잃어 제가 시라부를 덮친 꼴이 되었다. 서로 말이 없던 둘은 자세를 고쳐 일어섰다.
아저씨 진짜 모질다. 알았어요, 나는 평범하게 손에 피같은 거 안 묻히고 살게요.
그래, 꿈도 꾸지 마라.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지나쳐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우시지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욕실에 들어간 시라부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우시지마가 문을 열자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이 잠긴 시라부가 보였다.
시라부!
놀란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건져 올리자 시라부는 곧 물을 내뱉더니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후, 잠수 어렵구나.
... 잠수였나.
아저씨 좋아해요.
무슨,
나 좋아하느냐고요.
그럴 리가.
그럼 이렇게 늦게 올리가,
곧 말을 잃고 쓰러진 시라부가 막 건져올려진 생선처럼 파닥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우시지마는 샤워가운으로 시라부의 몸을 덮고 침대로 옮겼다. 하여튼간에, 별난 애라고 생각했다. 또 어찌보면 측은해지기도 했다. 시라부를 마지막으로 봤던 시간의 텀이 길기는 길었지만 보러갈 순 없었다. 자신이 맡은 일은 꽤 많았고 시라부를 지키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도 많았다. 한 조직의 수장이기에 더 바빴던 이유도 있다. 자신을 기다리다 지친건 심심한 위로를 보내야했지만 굳이 좋아한다로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 시라부 켄지로라는 소년을 마음에 품은 적은 없었다. 비록 업무 중에 문득 생각이 나긴 했었다.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것도 그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생각이었다. 소년의 머리는 아무래도 필터가 영 엉망인것 같았다.
시라부는 곧 눈을 떴고 제 앞에 있는 우시지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놀란 우시지마가 목을 빼려하자 더 강하게 끌어당겨왔다. 어쩌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있자 편하게 안아주세요. 하니 우시지마는 결국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어린 아이가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겠거니, 정도의 마음으로 살짝 안았는데 시라부는 아니었다. 애정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순수하지도 않은 불순한 감정의 부류였다. 아마도 사랑의 씨앗이 이상한 화학비료를 주어 잘못 자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라부는 적어도 온전치 못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우시지마는 감정없이 안아준다지만, 자신은 그의 가슴팍이 균일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느끼고 또한 심장의 박동도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우시지마가 자신을 떨어트려놓으려 하자 시라부는 그의 너른 등을 당겨 저에게 밀착시켰다. 우시지마도 딱히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소년이 원하는 것에 가만히 있었을 뿐. 별 다른 감정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우시지마와 시라부가 안은 채로 함께 밤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온전하게 둘은 밀착되어있었으며, 시라부가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든 바람에 우시지마는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자신도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먼저 잠을 깨버렸고, 덩달아 그의 움직임에 시라부도 잠이 깨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진 않으시는가.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시라부의 가까이서 들려왔다. 부모님, 없어요. 이제 혼자야.
없다고? 순간 우시지마는 멍한 느낌에 제 등에 묶여있던 시라부의 손을 풀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언제부터? 대체?
아저씨 안 오기 시작한 날부터. 나 졸업식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때 그렇게 뾰루퉁한 표정 짓지 말걸. 더 잘해드릴, 걸.
울음에 섞여 흐리멍텅해진 발음에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쳐다보자 시라부는 방울 지어 내던 눈물을 닦고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도, 아저씨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니까 저랑 함께 해주세요. 이제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아주시라는 이야기에요.
우는 얼굴에 웃는 것이 그리 예쁜지 몰랐었다. 제가 존경하던 선대 보스가 허망하게 죽어버렸다는 것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싶었으나, 소년의 앞에서 더 이상 말을 꺼내긴 힘들었다. 괜한 이야기를 한 것인가 싶었지만 언젠가는 할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소년을 거둬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 발로 들어온 소년을 내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할지도. 우시지마는 처연해진 마음에 싱긋 웃고있는 시라부의 머리를 감싸쥐고 제 품에 안았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이제 그만 힘들어도 되겠죠?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웃다가 훌쩍이는 것이 꼭 7살의 시라부 켄지로와 똑같았다. 그래, 네가 살아갈 세계가 얼마나 험난할지, 네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미지수다만. 그래도 항상 곁에 있겠다. 되도록이면 너를 지키는 쪽으로. 시라부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우시지마는 물기가득한 분위기를 나름 바꾸기 위해 아직도 그 검은 우산이 있다는 둥, 검은 양복은 사실 자주 안입는다는 둥의 이야기를 꺼냈다. 시라부는 그게 뭐냐며 한 번 더 웃었고, 시라부가 웃는 모습에 안도한 우시지마도 결국 제 품에 안긴 시라부를 그대로 안고 침대에 쓰러졌다. 이렇게 가득한 빛을 안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었다.
사실 순수한 느낌을 처음에는 생각했으나 시라부와 순수는 멀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돌발적일 수도 있는 말과 행동들이 시라부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시지마가 시라부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이 사랑보단 연민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월간우백 3월 호의 주제가 너무도 우시시라와 잘 맞기에 기쁘게 썼습니다!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