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기(期)
단지
누구든 각자 자신의 롤 모델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를 동경했기에 나는 배구를 계속하였고, 그를 동경했기에 이곳에 왔고, 그를 동경했기에 그에게 토스를 올렸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의 피나는 노력이 한몫했다. 하지만 그를 향한 동경이라는 허물을 쓴 나의 감정은, 존경심이 아닌 사랑이었다.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그의 배구 스타일이었다. 다음으로는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그가 유명인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진정 그라는 사람을 사랑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그의 이름이다. 그는 전국에 배구를 하는 고교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한 윙 스파이커였다. 당연히 그는 국가대표에 스카우트 되었고, 이제 더는 나와 같은, 일개 고등학교에서 세터나 하고 있는 나와는 이제 만날 일이 없는, 멀리 떠 있는 별로 남게 되겠지. 그런 마음을 나는 그에게 겨우 그의 졸업식 전날이 되어서야 전할 수 있었다.
"선배를, 좋아해요."
나의 감정을 전하고 나자 무언가 후련함을 느끼면서도 그가 나의 감정을 짓밟아준다면, 그 감정은 순식간에 꺼져버리지 못할 텐데. 화르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빠르게 식어버린 양은냄비와 같은 짓을 나는 하지 못할 텐데. 우시지마 선배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언제나 저랬지. 저 사람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눈치 없이. 거짓 없고 꾸밈없는 그의 성격은 나를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시라부"
그 조용한 정적을 깨버리고 그가 이야기를 하려 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할 이야기는 거절이라는 선택지 하나뿐이니까.
"그냥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좋아한다."
아, 엇갈렸다. 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잘 듣지 못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겠다. 사랑한다, 시라부."
그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고를 것이라고 내가 예상했던 선택지에서 보기 좋게 빗나간 선택지였다.
"그런데 시라부"
"...예?"
"나는 도쿄에 가야 한다. 그렇기에 나의 마음을 계속 감추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는 먼저 떠나버리는 것은 네게 너무 가혹한 일 같아서."
"맞다, 그러셨죠..."
"그래도 쉬는 날에는 꼭 놀러 오겠다.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지 시라부?"
"네! 당연히 기다려야죠...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우시지마 선배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그럼 내일 보자 시라부."
"네, 그럼 우시지마 선배도 들어가 보세요."
"알겠다."
우시지마 선배는 내가 그 곳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같이 있었던 장소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내 눈에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그 자리를 뜨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우시지마 선배가 졸업하는 졸업식 날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열렬한 사랑을 뜻하는 붉은 장미꽃으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축하해요, 선배."
"고맙다 시라부."
"오늘 와카토시군만 졸업하는 거야?"
"질투 나세요 텐도선배?"
"질투는 아니지만, 뭔가 수상한걸?"
"뭐가 수상해, 그럴 수 있지. 여기 다 모인 김에 사진이나 한 장 찍는 건 어때? 레온, 야마가타도 괜찮지?"
"저도 끼워주세요!!"
"고시키도 왔네~!"
"다들 거기 계셨네요. 선배들, 졸업 축하드려요."
"키노시타도 왔네?"
"그럼 다 같이 사진 찍자!"
"그래 그러도록 하자."
그래서 결국 우리는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졸업식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단둘이 있고 싶었는데. 단체 사진을 한 장 찍고 우시지마 선배는 또 어디론가 불려갔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나, 시라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우시지마 선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3학년 선배들이 자리를 떴다. 다들 같이 기념사진을 찍으러 가는 듯했다. 3학년들이 자리를 뜨자 카와니시나 고시키도 자리를 뜨려 했다.
"선배 저 가보겠습니다!!"
"나도 가볼게."
결국 난 그 자리에 혼자 남게 되었다. 멍하니 10분쯤 기다렸을까, 저쪽에서 우시지마 선배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시라부."
그러며 내 손에 슬며시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동그랗고 작은 무언가. 꼭 어딘가에 달려있었을법한 단추. 우시지마 선배의 교복 단추가 하나 없었다. 아마 내 손에 있는 단추의 제자리가 그곳이겠지.
"원래 교복 2번째 단추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내게 나의 단추를 주겠다. 시라부, 네가 졸업할 때 네 단추도 내게 주지 않겠는가?"
"아...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을까? 이 순간을 남길 수 있는 건 사진이 유일하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우시지마 선배와 단둘이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에 놓아두었다.
"우시지마 선배,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
절대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날이 내게 오고 말았다. 우시지마 선배의 소집일은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고,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잘 지내라 시라부. 휴식기에는 꼭 내가 내려오도록 하겠다."
"몸조심하세요, 우시지마 선배."
그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주로 통화를 통해 듣곤 했다. 자기 직전에 잠깐씩 우시지마 선배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삶의 행복이었다. 방학이 되면 그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
[당분간은 연락 잘 못 할 것 같아, 시라부. 시간이 잘 나지를 않아.]
"아, 저도 시험기간이라 당분간 연락을 매일 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둘 다, 여유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통화는 그만하자.]
"그렇게 해요. 우시지마 선배,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꿔라. 사랑한다, 시라부.]
우시지마 선배가 내게도 잘 자라는 인사를 해 주고는 통화 연결음이 끊기자,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곧 시험이니까 자주 연락 못 하겠지. 당분간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프긴 했으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딘가 허공에 붕 뜬 기분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계속되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몽롱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었다.
"켄지로, 정신 차려."
"어...응."
"오늘따라 얼빠진 사람처럼 왜 그래? 우시지마 선배 때문이야?"
"어쩌면?"
"선배도 바쁘시겠지.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도 힘드실 테고 시험만 끝나면 방학이잖아? 조금만 참아."
"그래야겠다. 위로 고마워, 타이치."
그 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방학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말이다. 시험이 끝나는 날 때쯤, 우시지마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어쩐 일이세요, 우시지마 선배?"
[곧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시라부.]
"정말요?"
[다음 주 이거나 그다음 주쯤 에는 휴식기라서 갈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내가 가겠다.]
"그럼 그때 뵈어요, 선배."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그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번 방학 때 몰아서 할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산책하러 나가거나 하는 단순한 일들을. 어쩌면 오랜만에 그에게 토스를 올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그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행복했으니까.
*
우시지마 선배가 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이야기해 준 기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 우시지마 선배는 오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닌데,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뉴스는 빗길에 교통사고가 생겼다는 이야기.
'에이 설마, 저런 일에 선배가 엮였겠어.'
사건 발생 장소가 선배가 있는 곳 근처라는 사실이 조금 촉이 좋지 않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그저 기차가 연착되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혹은 그가 늦게 출발하여 늦게 오는 것 일 거라고. 휴대전화의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우시지마 선배에게 온 전화이겠지. 하지만 휴대전화에 찍힌 발신인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었다.
'세미 선배가 이 시간에...?'
"선배, 어쩐 일이세요?"
[아직 뉴스 못봤구나, 시라부.]
여느 때와는 다른 듯한 어조. 차분히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왜인지 모를 침통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도쿄 빗길 교통사고, 그거 우시지마야.]
"네?"
[어젯밤에 일어난 사고인데, 아직 몰랐던거야? 어제 도쿄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만취한 운전자가 빗길에 차를 몰다가 미끄러져 길 가던 사람을 쳤다더라고. 그런데 그 차에 치인 사람이 우시지마인 모양이야.]
"그래서...선배는 지금 어디세요?"
[나는 당연히 도쿄지. 너는 지금 어디야?]
"우시지마 선배...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이곳에 오신다고 하셨거든요."
[......일단 알았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네, 선배.“
우시지마 선배가 사고를 당하고 다음 날, 세미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은 아직 우시지마 선배가 깨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어제 오다가 잠시 개인 듯하던 날씨는 다시 우중충해졌고, 구름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가늘던 빗줄기는 금세 굵어졌고 그 빗줄기는 내 몸을 적셔왔다. 추억도 이 비에 다 씻어 내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꿨다. 우시지마 선배가 나오는 꿈. 꿈속에서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시라부.'
그가 뒤이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잠에서 깨어버렸으니 말이다. 밖은 새벽이어서 아직 어두웠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세미 선배였다.
"여보세요."
[시라부.]
"네. 말씀하세요."
[우시지마가...죽었어.]
내 마음속 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던 줄이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끝까지 내게 모질게 대하는군요. 기다리라고 해 놓고, 찾아갈 수조차 없는 곳으로 도망가버리면 이제는 정말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우시지마 와카토시. 어쩌면 그가 꿈속에서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안녕’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