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On the line

한지

On the line: 위태로운

 

1. 

검정색에 가까운 남색 만년필은 잉크를 쏟아내듯 노트위에 가볍게 미끄러졌다. 은색의 첨단은 오돌토돌 선 종이와 접촉해 귀를 간지럽힌다. 도돌이표에 걸친 한 구간만 반복하듯, 동일한 글자만이 선 위에 이어졌다. 

‘白鳥沢’ 

첫 번째 줄 왼쪽 끝에서부터 시작한 손은 가장 아랫줄에 이르러서야 속도를 줄이고, 이내 멈춘다. 잉크가 노트에 묻지 않게, 촉을 위로해 만년필을 눕혔다. 두 발을 의자위로 올려 구부러진 무릎을 껴안는다. 정리를 하지 않아 평소보다 살짝 긴 머리카락이 이마와 맞닿은 무릎을 타고 둥글게 떨어졌다. 시라부는 나지막이 눈꺼풀을 내렸다. 분명 살에 닿아 있건만, 엄지와 검지에서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겹도록 쓴 단어임에도 머릿속에서, 허공에, 손끝에 새기듯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선배는 어떻게 썼더라. 섬세하고 날카로운 자신의 글씨체와는 달리 반듯한, 동시에 두꺼운 필체를 상상한다. 왼손잡이, 그래 그는 왼손잡이였다. 엄지와 검지로 상단 부를 붙잡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지지한다. 빠르지 않은 속도는 두툼한 선을 자아냈다. 규격에 맞는 크기. 그는 필체와 닮은 사람이다. 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전국 탑 3 스파이커’ 라는 주제로 우시지마는 곧잘 인터뷰나 방송매체에 얼굴을 보이곤 했다. 왼손잡이 스파이커라는 명칭과 함께 그의 외모는 사회에서 환영하는 남들과 ‘다른’요소였다. 물론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 했지만. 선배의 그런 면이 좋았다. 심지가 곧은 나무와 같은 사람. 뿌리가 단단하고 밑동부터 굵직한 나무. 그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벽 한편에 걸린 사진을 바라본다. 지난 여름합숙이 끝난 마지막 날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교과서에서 본 자석과 철가루를 상기해낸다. 둥글게, 철가루는 자석의 범위 내에서 일정한 궤형을 그린다. 벗어나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채 맴도는 철가루. 스스로 답지 않게 감성적이라 느끼며 우시지마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의 작은 몸짓에도 흔들리는 자신을 생각한다. 상념은 어느새 눈앞의 사진으로 옮겨간다. 우시지마를 바라봤다. 자신을 힐긋 쳐다보는 시라부를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변하지 않는 관계일 것이다.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만년필을 손에 쥐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牛島 若利, 우시지마 와카토시. 주문이라도 외듯 간절한 마음으로. 

 

On the line. 

 

“이번 상대는 미야기 대학이다.”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목구멍을 긁듯 거칠고 갈라지는 목소리. 와시조는 두 눈을 바짝 뜨고선 모두를 훑어본다. 짧고 뭉툭한 눈썹아래 자리 잡은 주름은 눈꼬리 쪽으로 팽팽하게 펴졌다. 뒷짐을 진채로 꼿꼿하게 서 있는 우시지마와 레온을 제외하고는 제각기 편안한 자세로 서있다. 고시키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등이 펴지다 못해 굳곤 했다. 텐도와 카와니시는 경기에 임하기 전 고시키를 놀리는 데 집중했다. 그것은 새해맞이 기념으로 구매하는 빨간 부적처럼, 그들에게 있어 관례와 같은 행위였다. 

수비에 능한 팀이니 신경 쓰도록. 상대팀에 대해 간략하게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시라부를 쳐다봤다. 시라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앙 다문 입술은 대답을 내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와시조는 벤치에 돌아가 앉아 팔짱을 꼈다. 토스의 배분을 잘 해라. 상대팀의 블로킹을 따돌리는 공을 올려라. 세터라면 피해갈 수 없는 잔소리도, 토스 앞에 구차하게 붙는 수식어도 시라부는 기피했다. 간단했다. 이기면 된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저의 팀이, 정확히는 우시지마가 속한 팀이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기가 진행될 때면 시라부는 자신의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신발 밑창의 묵직한 고무와 코트 사이의 마찰로 인한 탄내. 중학교 때부터 겪었지만 적응이 안 되는 건 매 한가지였다.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각 팀마다 특색이 있다지만 시끄러운 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야마가타가 리시브한 공은 포물선을 그리듯 시라부의 머리위로 내려왔다. 다른 종들 사이에 섞인 독수리가 눈에 띄듯, 소음 속 미련스러울 만큼 조용한 우시지마는 누구보다 시끄럽게 저의 존재감을 뽐냈다. 손을 뻗어 공을 올린다. 손끝에 닿았던 느낌마저 사라지고 공은 벌써 우시지마의 최고 타점에 도달했다. 

그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두툼한 손바닥에 닿은 배구공은 튀어 오르듯 선 안에 안착한다. 가벼운 발놀림과는 달리 묵직한 크로스였다. 매뉴얼에 맞춰 움직이는 기계처럼 시라부의 토스에는 망설임은 없었다.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 그건 언제나 우시지마였다. 

‘시라토리자와’라는 글자 옆 숫자가 2로 바뀐 순간 호각과 함께 경기는 끝이 난다. 2-1. 대학생을 상대로 승리를 걷었음에도 시라부의 표정은 어쩐지 찝찝해 보였다. 마지막 토스를 생각한다. 평소보다 좀 더 느린, 왼쪽으로 치우친 공. 손끝에 배어있던 땀 때문인 걸까. 평소의 자신답지 못한 초조한 토스라 생각했다. 우시지마가 아니었다면 분명 자신의 실책이었을 것이다. 피드백을 하는 동안에도 마지막 토스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못한다. 땀으로 인해 미끈거리는 손바닥을 쥔다. 손톱은 살을 파고들 기세였다. 초조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도망치듯 가방을 들고 나왔다. 마치 그 날처럼. 

 

2. 

커다란 더플 백에 신발과 물통, 수건을 우겨넣듯 집어넣었다. 한자로 적힌 ‘호우코쿠’란 글씨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중학교 재학 당시 시라부의 학교는 딱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애매한 재능은 때때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올라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주고선 끝내는 달콤한 열매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한 가닥의 무언가 만큼은 뺏어가지 않기에, 모두들 다음번에는 할 수 있겠지, 성공해내겠지 하는 바람을 놓을 수 없다.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함. 단어 뜻 그대로 시라부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곤 했다. 모두가 발등에, 져지에 눈물을 묻힐 때도 덤덤할 수 있었다. 1회전 탈락은 아니지만 결승에는 못 갈 정도의 수준이다. 이 정도면 딱 맞게 올라온 것이다. 아슬아슬한 경계선. 한 점 차이로 뒤바뀌는 순간에도 그는 그 선을 넘고자 하지 않았다. 

함성소리가 시라부의 귀를 때렸다. 경계를 넘지 않으며 평형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시라부는 순간, 몸이 흔들거림을 느꼈다. 처음이란 계기는 단순했다. 아주 작은 호기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시지마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위와 옆으로 조금씩 늘어난 신체적 변화를 제외하고선. 

파란색의 얼음 모양이 새겨진 버튼을 누르면 유리 잔 위로 말간 물이 떨어진다. 우시지마의 눈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오직 승리만이 가득한 눈빛. 망설임이나 패배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는 듯 더없이 맑고 깊은 눈이었다. 경기장의 환호성도 밝은 조명도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순수한 열정, 승리를 향한 강렬한 믿음. 그의 존재감을 온 몸으로 느꼈다.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차갑지만, 뜨거운. 시라부에게 있어 그는 모든 감각이었다. 

후덥지근한 열기를 느끼며 시라부는 가픈 숨소리를 내뱉었다. 3세트를 풀로 뛴 직후처럼 두근거렸으며 갑작스레 자신을 덮치는 두근거림이 무서워졌다. 급하게 가방을 들쳐 메고 나왔다. 어쩐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 메스꺼운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아직도 형형하게 들린다. 

중도와 평형. 시라부는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위를 갈망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뒤처지지 않을 뿐.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저를 혼내기라도 하 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강해지고 싶다. 그보다 더 위로, 선 너머로 가보고 싶다. 저답지 않은 생각이라 스스로를 꾸짖으면서도 한편에 자리 잡은 미련을 감출 수 없다. 터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배운 적은 없지만 완전히 틀린 내용은 아니라 생각했다. 시라토리자와에 합격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태풍의 눈에 서있는 것 마냥, 저를 둘러싼 환경은 휘몰아치고 변화하고 격렬했다.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시라부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밖으로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뻣뻣한 종이에 금박이 박혀있는 합격 증서를 받고서도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우시지마를 만난 이후로 패배란 단어는 불가결한 요소였다. 

평범한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뛰어난 세터이기는 해도 추천 전형을 받을 만큼의 실력은 아니다. 자신의 애매한 재능을 시라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평범한 노력으로 닿을 수 없다면 평범을 뛰어넘는 노력을 가한다. 묵묵히 공부했다. 그리고 기다릴 뿐이다, 결과를. 한없이 기다린다.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우시지마였을 뿐이다. 

배구부에 입부한 시라부에게 부여받은 자리는 오른쪽 맨 끝이었다. 여기서의 맨 끝이란 일종의 계급을 나타냈다. 추천 전형이 아닌 174.8cm의 1학년. 그는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주전보다 눈에 띄는 존재였다. 부원들의 시선은 시라부를 향할 때가 많았다. 추천 전형이 아닌, 일반전형. 분명 ‘일반’전형이건만 그는 배구부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였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와 독설을 내뱉는 입술은 어쩐지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요한 눈빛은 우시지마를 담을 때만 요동쳤다. 동경이었다. 자신이 패배할 리 없다 믿는 우시지마를 텐도는 장난삼아 놀리곤 했지만, 시라부에게 있어 그의 어투, 행동은 절대적 명령과도 같았다. 복종. 그가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 거스르지 않는다. 

우시지마와 딱히 이야기는 해 본적이 없었다. 같은 배구부라고는 해도 주전과 1학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기 마련이었다. 좌절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길을 지나쳐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갔다.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기회는 주어지기 마련이다. 

비가 내렸다. 며칠째 이어진 폭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고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꺼운 구름층은 겹겹이 쌓이고 쌓여 빛을 차단했다. 습하고 음울한 분위기는 바닥에 깔린 연기처럼 누군가에게 파고들기 쉽기 마련이다. 그게 마음이건 몸이건 간에. 

하지만 삶이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한 학년 위에 주전세터인 세미는 며칠째 부 활동을 빠지는 중이었다. 감기라는 간단명료한 병명이 수반 된 채 말이다. 

계속되는 장마와 쌀쌀해진 날씨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한없이 나른하게 만들었다. 빈자리는 결국 누군가가 대신해서 채우게 된다. 시라부 역시 세미의 대체품이라는 명목으로 투입이 되었다. 표현이 다소 거친 거 같지만 모두의 마음은 다 똑같았다. 세미가 돌아오면 주전센터로, 시라부는 다시 후보군으로 빠질 것이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시라부 자신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기다린다. 기회였다. 자신이 그토록 바래온 기회. 우시지마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저만큼 우시지마를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은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어쩔 때면 저 자신보다도 더 많이 보는 이가 우시지마였다. 온 힘을 다해, 그러면서도 가볍게 손을 뻗는다. 네트에서 멀리 떨어진 오픈토스.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 공을 올렸다. 또 올린다. 또, 또….

연습이 끝난 후 평소와 같이 공을 정리한다. 저를 향하는 동기들의 은근한 눈빛도, 견제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시라부 은근 독하다니깐. 안그럴꺼 같아선 우시지마 선배한테 그렇게 올리다니.’

온 몸을 휘감는 흥분감과 이와 상반되는 고요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공을 주우려 구부린 채 자신의 다리의 떨림을 감지한다. 환희의 감정. 드디어, 우시지마에게 공을 올렸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왈칵, 나옴을 느꼈다. 

오늘의 57점 득점 중 우시지마가 획득한 점수는 24점. 거의 한 세트에 가까운 점수였다. 남들이 하는 얘기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길 뿐이었다. 

“우시지마, 텐도, 레온, 카와니시, 야마가타, 그리고 시라부.”

마지막으로 시라부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웅성거림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시라부라니. 목소리에는 걱정과 그 밑에 진하게 깔린 의문이 있었다. 도쿄 명문 사립대인 K대와의 연습시합이었다. 3학년들이 떠나고 새로운 체계가 구축되는 중요한 시점의 경기였다. 시라부와 우시지마만이 아무말이 없었다. 자신은 죽이고 에이스에게 헌신하는 배구. 시라토리자와에 있어 가장 적합한 세터는 시라부였다.

 그 뒤로 시라부는 시라토리자와의 주전 세터로, 우시지마의 파트너로 코트에 서게 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우시지마에게 공을 올리는 모습. 세터는 가장 공을 많이 만지는 선수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공격의 기회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가 결정이 되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우시지마는 항상 뛰어올랐다. 자신에게 공이 올 거라 의심치 않으면서, 물론 시라부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적당히 공기가 빠진 풍선과 같다.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빠져나온다. 그 차이란 실로 미묘하고도 애매한 경계였다. 슬픔과 기쁨, 증오와 애정 또한 어느 부분을 건들이냐에 따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감정이었다. 정전기와 같은 짧고도 짜릿한 자극은 항상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내곤 한다. 그리고 그 정전기가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봄이었다. 시라부가 2학년, 우시지마가 3학년이 된 그 해의 봄. 따뜻한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녹진하고 진득하게 녹이곤 했다. 춘곤증인가. 시라부는 자신의 몸이 축 가라앉음을 느끼며 책상에 엎드렸다. 무기력했다. 손 끝은 물론 몸 어느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마에 닿는 햇살 때문일까 어쩐지이마가 뜨겁다고 느끼며 잠이 들었다.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꿈속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풀이라도 붙여놓은건지 평소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반만 뜬 채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순간 우시지마의 모습이 보인다. 놀란 채 나머지 반을 마저 뜨면 모습이 또렷히 보인다. 카와니시였다.

“아…. 뭐야?”

“연습 가야지. 왜 나라서 실망했어?”

가방을 챙겨 나온다. 실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카와니시를 타박하는 목소리는 힘이 없이 끝을 흐렸다. 오른쪽으로 한 발짝, 왼쪽으로 세 발짝. 걸어가는 뒷모습은 어쩐지 불안했다.

평소보다 조금 무겁다고 생각했다. 살이 찐건가 싶다가도 오늘 하루동안 먹은 게 없다는 사실을 이내 떠올린다. 얹힌 듯 답답하다가도 곧잘 공허해졌다. 팔이 무거웠다. 토스를 하려 드는 손도, 움직이는 발도 어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반 발짝을 더 내딛어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제 몸을 속으로 원망할 뿐이었다.

쉬는 시간에 와시조는 시라부를 따로 불렀다. 교체의사에 대해 물어보는 말에 고장 난 테이프처럼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괜찮지 않으면 안됐기에. 

다시 연습이 재개되었다. 손발은 더 이상 가눌 수가 없었다. 발과 발이 뒤엉켜 헛디뎠다. 그래도 매끄러우니 상처는 안 나겠구나. 미끄러지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시라부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쿵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야했다. 그래야 했는데. 자신의 허리에는 두껍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사람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자신이 무사한 것에 대한 안도가 아닌 우시지마에 대한 감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배구만이 전부인 것 같던 얼굴에는 제법 사람 같은 표정이 어려 있었다. 크게 뜬 눈과 그에 맞춰 바싹 올라간 눈썹. 알 수 없는 표정. 아니 분명 알 수 있을 법도 한데 오늘의 시라부로서는 알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아프면 세미와 교체해라.”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프지 않다는 시라부의 말에도 표정은 강경했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상태로 더 해봤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걸. 우시지마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라부는 편하게 교체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면 어떻게 하지. 우시지마의 옆에 설 수 없다면. 아프고 병든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라부의 머릿속을 차츰차츰 점령해갔다.

한 번도 우시지마의 말에 거역을 해 본적이 없었다. 시라부에게 있어서만큼은 우시지마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모든 일의 기준점. 그 선을 넘지 않으며 시라부는 조심스럽게 지내왔다.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끌고 코트에서 나왔다. 대략 2배정도의 차이는 시라부의 손을 우시지마의 손에 감싸져 사라지게 만들었다. 

“걱정마라 시라부, 지지 않는다.”

시라부는 멍하니 우시지마를 바라봤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한기에 온 몸을 벌벌 떨면서도 시선은 그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뛰었으며, 공을 내려치고, 점수를 얻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은 흔들려도 좋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자신은 우시지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경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두근거림. 열 때문인지 우시지마때문인지 시라부의 시야는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학교 때 우시지마를 처음 봤던 그 순간처럼, 두근거리고 어지러웠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우시지마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걸때까지만 해도 멍하니,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겼다.”

변함없는 그의 시선에 시라부의 풍선은 펑-하고 터져버렸다. 존경이란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항상 우시지마의 곁에 있었으나 이전과는 다른 관계였다. 일방적인 짝사랑. 우시지마는 파트너라는 위치로서 자신을 배려해줬다. 그가 제시한 선을 넘으려는 사람은 저 자신이었다. 나는 그를 배신했다. 

우시지마는 놀라울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었다. 우직하다 못해 뻣뻣할 정도였지만. 그는 약속을 잘 지키곤 했다. 아니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파트너로서의 자리. 우시지마가 시라부에게 ‘약속’한 것은 딱 그 정도였다. 시라부는 다시 우시지마를 모르던 중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선 안에 갇혀 그 선을 벗어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 아슬아슬하게 선을 걸치며 헛된 욕심을 품는 순간 떨어져 버리는 상상.

남은 선택지는 실상 하나뿐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 기다리는 것만은 자신 있었다. 그 대상이 우시지마라면, 이 정도 기다림은 괜찮지 않을까. 곪아가는 자신의 마음을 도닥이며 시라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계절이 흘렀다. 온난한 봄의 정취는 새싹으로 변했으며 뜨거운 여름의 햇살은 새싹을 나무로 키워냈다. 지금 가을의 향기는 발갛게 물든 어린아이의 손바닥 마냥 살며시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은 춘고 예선에서 떨어졌다. 사실상 3학년들의 은퇴였다. 

3학년들은 간간히 찾아왔다. 처음에는 심부름을 핑계로, 그 다음에는 간식, 그리고 훈련을 봐 준다는 명목으로. 3번째 찾아온 순간 시라부의 

“그런 말 같지 않은 핑계 대실 거면 차라리 그냥 오세요.”

라는 말을 듣고 거리낌 없이 체육관을 드나들게 된 지 어느새 2주째였다. 

시라부의 일상은 딱히 바뀐 게 없었다. 매일 같이 수업을 듣고 체육관에 온다. 개인 연습이 끝나면 연습경기를 한다. 그리고 공을 올린다. 그리고 그곳엔…. 그가 없다. 사진에서 한 부분만 톡 하고 잘라낸 것처럼 그가 보이지 않았다. 연습을 보러 오는 3학년들 사이에도 유독 그만 없었다. 

우시지마를 찾는 시라부를 눈치 챈 건지 다들 우시지마의 행방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추천을 받아 입학할 학교에 가 연습을 하고 있다고. 아 그렇구나. 시라부는 빠르게 수긍했다. 이제 자신의 옆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어째서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을까. 파트너로서 자신을 약속한 그 사실 때문인 걸까.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옆에 있는 제 모습을 확신했다. 

어쩌면 일종의 기만이었으리라. 나만이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옆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우시지마는 제 곁 한편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선 또한. 그는 저 멀리 달아나 손을 뻗을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라부는 그럼에도 그 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지 않을 우시지마를 기다리며 계속 선을 밟고 또 밟을 뿐이었다. 그를 찾으러 선 밖으로 벗어날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흘렀다. 시라부는 한마디로 긴장한 상태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칼을 툭 하고 건드리면 바로 깨어질 상태.

혼자 남아 스파이크 연습을 했다. 원래 추가연습을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우시지마가 떠난 뒤 시라부는 자신을 다그치는 연습량을 늘렸다. 저에게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와 저를 잇는 마지막 경로라 생각했다. 시라부는 공을 던졌다. 선배는 어떻게 뛰었지. 시라부는 두꺼운 고무와 나무 바닥 사이에 끈적끈적한 감촉을 느꼈다. 정상에 올라온 그 순간….

 

3.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 있었다. 슬로우 모션처럼 모든 것이 멈추고 시야에는 그 사람만 담기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선배가…. 그야 말로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차이점이라면 누군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사실이지만. 서브를 날리려 도약을 한 시라부는 그대로 착지를 했고 공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라부와 우시지마 사이에는 아무말이 없었고 공만 눈치 없이 퉁..퉁…소리를 내며 구를 뿐이었다. 

우시지마는 제 발밑으로 굴러온 공을 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공만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자연스레 코트위에 올라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왜 왔는지 물어볼게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스스로 말해줄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라부의 토스가 점점 낮아지는 시점에 우시지마는 도약을 멈췄다. 산책을 하자는 말을 하며 우시지마는 먼저 길을 나섰다. 

시라부는 간단한 정리만 한 채 그를 따라 나섰다. 별 말은 안했다. 서로의 안부와 새로 시작한 연습은 어떤지. 시라부는 다른 건 다 물어봤지만 새로운 세터에 대해서만큼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 옆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약속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쩐지 그는 키가 더 큰 거 같았다. 연습복을 입고 있지 않는 그는 새로웠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우시지마. 한 발짝 뒤에서 보는 그의 뒷모습은 2년 동안 봐왔던 모습인데, 미울 정도로 낯설었다. 시라부는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그가 저에게 약속했던 파트너로서의 자리도, 진득하게 그를 기다려왔던 시간도. 한순간에 의미가 없는 일이 될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져 서있는 시라부를 바라본다. 분명 한 발자국의 차이였던 간극은 벌어져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시라부의 모습은 처연하고 한편으로는 담담해보였다.

“선배 다음에는 다른 선배들이랑 같이 또 놀러오세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시지마와 저의 거리는 시라부의 발걸음으로 5걸음, 우시지마의 발걸음으로는 4걸음. 닿을 수 없는 한걸음이 마음의 차이 인걸 안다. 또 다시 기다린다. 언젠가 그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선을 걸어간다.

안녕하세요 한지입니다. 우선 제 글을 월간 우시시라에 올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제 글의 결말이 좀 애매하게 끝나긴 했지만 결국 이 둘은 사랑을 할꺼니까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거 같아요! 그냥 두 사람이 사랑하는 과정의 연장 선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월간 우백의 모든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작가의 허락을 받지않은 전재 및 재배포를 엄금합니다.

MONTHLY USSR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