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Color Harmony 中
작가미상
* 전편 링크 : https://keeponly1ove.wixsite.com/monthly110-2/blank-9 (주소를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시간을 십여 분 가까이 단축해서 도착한 곳은 허름한 빌라 앞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녹슨 속을 보여내는 대문 앞에 선 시라부의 표정이 어둡다. 그의 인상이 본격적으로 험악해지기 시작한 건 옆에 놓인 벽돌을 들어 그 밑에서 열쇠를 꺼내는 우시지마를 봤을 때 부터였다.
끼익,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는 문을 넘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우시지마의 뒤를 시라부가 따라간다. 들어간 집 안은 어지러웠다. 옷가지들과 수건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선들이 난잡하게 그려진 크로키종이가 발에 채였다. 곧 드문드문 떨어진 물감 자국까지를 발견한 시라부가 마른세수를 한다.
양말을 걱정하며 시라부가 옆에 놓여있던 슬리퍼 두 짝을 꿰어 신는 동안, 거실 베란다의 문을 연 우시지마가 밖으로 나간다. 시야에서 사라진 그를 찾아 밖을 살피던 시라부의 동공은 경악으로 굳어진다. 우시지마는 벽에 박아 놓은 사다리를 타고 위층의 창문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우시지마가 머리만 빠끔히 내민 채 어서 올라오란 듯이 시라부를 쳐다본다. 늘 그렇듯, 태연한 자태로.
가까스로 창문을 넘어 들어온 시라부의 얼굴이 창백하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고르던 시라부의 눈에 우시지마의 발끝이 걸린다. 우시지마에게 문제의 사다리를 따지기 위해 치켜든 눈이 일순 멈춘다. 세상의 모든 색色이 모여 있다면 아마 여기가 아닐까. 눈길이 닿는 족족 색들이 시라부의 시선을 옭아맨다. 쉽게 눈을 땔 수도, 그렇다고 돌리지 않을 수도 없는 풍경이었다. 저기 벽에 기대놓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하나같이 채도가 높은 색들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한 색들을 저만큼 어색하지 않게 녹일 수 있는 현존하는 화가가 과연 몇이나 있을지.
그 뚜렷함의 바로 옆에 놓인 그림은 물에 연하게 풀어져 흐릿한 모양으로 보통의 수채화보다 훨씬 연한 색을 띄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옅은 그림은 유화그림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나란히 붙은 두 그림이 자아내는 간극에 시라부가 일어서던 것도 멈추며 어정쩡한 자세를 한다. 멍한 눈을 한 채 연신 작업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시라부가 귓가에 이는 소음에 내내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킨다.
소음의 주체는 우시자마의 손끝에서 퍼져가고 있었다. 작업실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을 끌고 와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나무의자에 앉은 커다란 뒷모습이 시라부의 시야에 들어찬다. 검은 몸통을 깎아내는 우시지마의 손길에 맞춰 연필의 부산물들이 떨어진다. 파란 쓰레기통 위로 점점이 나타나는 그것들은 마른 땅 위로 떨어지는 꽃잎들 같았다.
시라부가 작업실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우시지마는 어느새 앞치마까지 매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뻑뻑해 보이는 검은 앞치마에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기름 냄새가 퍼져 나왔다. 손님이 앞에 뻔히 서있는데도 밑도구 준비에만 바쁜 그 무신경한 모습에 시라부도 이제는 포기한 듯 알아서 작업실 안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한다. 방금 전 시라부의 눈을 묶어두었던 나란히 서있는 두 그림을 시작으로 반대편의 벽에 걸린 그림까지. 슬슬 동나기 시작하는 그림들에 시라부가 아쉬운 듯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벽의 가장 구석진 곳에 걸린 캔버스가 작업실 안의 마지막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어딘가 눈에 익은 다리가 그려져 있었다. 시라부는 곧 그 다리가 세느 강의 다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은 저녁의 세느강 정경이 그려진 스케치화로 유람선과 에펠탑에서 나오는 빛이 물 위에 투영되는 부분이 특히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그 그림은 앞서 보았던 그림들과는 다른 섬세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라부는 유독 그 그림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팔레트를 닦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우시지마가 다리가 아프지 않냐며 물어볼 만큼. 그림을 보는 시라부의 눈이 기억 저편을 더듬듯 잠겨있다 들리는 목소리에 초점이 돌아온다.
작업실 구석에 널브러져있던, 음직일 때마다 삐걱대는 비명을 질러대는 싸구려 접이식 의자는 역시나 시라부의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편한 자리를 찾은 시라부가 얌전해지자 작업실 안의 공기가 가라앉는다. 다시 작업에 열중한 우시지마가 만들어 내는 사각거리는 연필소리만 들리던 고요한 공간을 나직한 목소리가 균열을 낸다.
“예명이 사람 이름 같던데요.”
“아, 아버지 이름입니다.”
“아버지랑 사이가 좋으신가 보네요.”
“... 글쎄요.”
의외로 그의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예명을 실제 인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의아함에 던진 질문에는 여전히 답답하기 만한 대답이 돌아온다.
“프랑스에 유학을 가셨던 거죠? 제 주변 화가들은 대부분 독일로 가던데.”
“유학이요?”
“예?”
***
짜악-. 남자가 손을 휘두르자 소년이 뒤로 날아가듯 처박힌다. 오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남자가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우시지마의 바구니를 걷어찬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위협적으로 발을 구르는 남자를 피해 다른 아이들은 벌써 도망을 간 뒤였다. 그만이 남자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잠시 뒤, 남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우시지마도 그제야 방으로 돌아간다.
그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깨질 거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린 자신은 이미 바다 위였다. 이전 고아원에서는 그를 외국으로 팔아넘겼고, 우시지마는 팔린 곳에서조차 버림을 받았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움켜쥔 채 돌아간 방은 여전히 좁았다. 우시지마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여러 개의 매트리스를 깨금발로 지나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자신의 잠자리로 갔다. 이미 너무 낡아 제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마저도 온전하지 못한 채 절반이 잘려 제멋대로 튀어나온 노란 스펀지를 드러낸 낡은 매트리스가 이곳에서 유일한 그의 공간이었다. 우시지마의 무게에 눌려 녹슨 스프링들이 신경질적인 소리를 낸다.
날아갈 때 제대로 감싸지 못한 것인지 오른쪽 어깨가 유독 아프다. 우시지마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내밀어 창가를 바라본다. 때가 낀 창가 너머로 불투명하게 화려한 파리의 밤이 보인다. 늘 자기전마다 보던 광경을 오늘도 눈에 꼭꼭 담으며 조심스레 그가 손을 침대 매트리스 안으로 집어넣는다.
손끝에 걸리는 종이를 조심조심 빼낸 우시지마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목탄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목탄은 방금 전의 충격으로 반쯤 뭉개져있었고, 종이는 싸구려 갱지여서 얼룩덜룩했지만 개의치 않고 긋는 선 하나하나에는 신중함이 담겨있다.
곧 그림을 완성한 후, 남은 종이와 그림은 매트리스 속으로 넣은 우시지마가 이제야 지친 몸을 누인다. 이제는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한 어깨를 목탄의 잔재에 얼룩진 손으로 움켜쥔 채. 이 날은 더 이상 우시지마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날이며 그의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벌어오던 -그래봤자 동냥질이지만- 돈의 일부로 야금야금 종이를 사던 짓이 걸린 것은 열네 살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불같이 화를 내던 남자는 곧 우시지마의 그림을 보고 돈 냄새를 맡았는지 그를 화가로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며 세느 강의 풍경과 초상화를 그린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텐도를 만나고 그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저 그림은 그날의 우시지마가 그린 그림이었다. 빠르게 비서를 시켜 그를 시설에서 빼낸 텐도가 공항으로 가려하자, 머뭇거리면서도 그는 세느 강의 정경을 그린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싶다며 말했었다. 그리고 우시지마는 처음으로 흰 종이에 그린 자신의 그림을 가지게 되었다.
물감으로 얼룩진 팔레트를 닦아내며 우시지마가 길지 않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 고조 없는 목소리가 하여금 시라부를 숨소리도 크게 뱉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고등교육으로 만들어진 수준 높은 화가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열악한 환경을 모두 덮어내었던, 다소 단순했던 천재였다.
“그럼 아버지와는…….”
“ 글쎄요. 얼굴도 본 적이 없어서요. 어렸던 저를 고아원 앞에서 발견했을 때, 손에 이름이 적힌 종이를 쥐고 있었다는군요. 그것뿐입니다.”
그날 결국 시라부는 관장실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우시지마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가 채색을 끝내는 모습까지를 모두 지켜보고 나온 밖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새벽을 꼬박 새고 일을 마친 시라부가 비서가 가져다준 담요를 덮고 소파에 몸을 기댄다.
눈을 감자 오늘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특이한 남자였다. 그런 약속자리에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나타나다니. 심지어 후드티의 소매 끝자락에는 물감 몇 방울이 튀어있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따위의 대답만 뱉어내는 주제에 그림은 그렇게도 풍부하다. 텐도를 만나 괜찮은 에이전시에 소속됐기에 망정이지, 사기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다. 우직하고 미련한 게 딱 곰과 닮았다고 생각하던 시라부는 결국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든다.
***
단조롭던 시라부의 일상에 괴짜화가 한명이 들어왔다. 이제 시라부의 하루 일과는 그의 작업실을 들려야만 마무리가 가능했고, 시라부는 그 시간을 내기위해 세 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일에 네 시간 일찍 일어난 시라부가 마른세수를 한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푸석한 얼굴을 문지르던 중 노크소리와 함께 그의 비서가 들어온다.
“관장님, 이번 프랑스 옥션 리스트 뽑아왔습니다. 직접 가실건가요?”
“리스트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다음 달에 열리는 도와옥션에 낼 그림들은 어떻게 할까요?”
“내일까지 보내겠습니다.”
비서가 곧 들어왔을 때와 같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다. 잠시 후, 퇴근시간이 되자 시라부가 익숙한 도로를 따라 빌라 앞에 도착한다. 여전히 낡고 적응되지 않는 외관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그를 본 우시지마가 자연스레 의자를 가져다준다. ‘여권은 있으세요?’ 대뜸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시라부를 우시지마가 쳐다보자 그제야 자초지종을 말한다. 다음 주에 열리는 프랑스 옥션에 함께 가자며, 이번 옥션은 유독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며 시라부가 리스트를 보여준다.
평소의 냉한 표정이 풀어져 들뜬 기색을 한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우시지마가 손을 뻗어 시라부의 귓바퀴 끝을 잡는다. 예민한 귀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에 시라부가 놀라 손을 쳐낸다. ‘귀가 붉어서요.’ 우시지마가 놀란 시라부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린다. 오랜만에 느끼는 불편한 적막이 둘 사이를 감돈다. 곧 오늘은 일이 많아 이만 가보겠다며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던 시라부가 코트 안쪽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우시지마의 쪽으로 던진다. 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시라부의 손끝이 붉다.
준비 없이 날아온 서류를 얼굴에 맞은 우시지마가 얼얼한 코를 문지르며 봉투를 열어본다. 서류의 첫 페이지에는 이번 도와옥션에 나올 그림 리스트가 적혀져 있었고, 그의 이름은 가장 윗줄에 쓰여 있었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온 공항의 천장은 예전만큼 높지가 않았다. 유리창 벽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우시지마는 곧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에 눈을 돌린다. 시라부가 우시지마 몫의 티켓을 건네주며 탑승게이트로 그를 이끈다.
곧 출발을 알리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고 비행기가 이륙한다. 몇 번을 타도 이 몸을 짓누르는 감각만큼은 기분이 나쁘다. 예민한 성격의 시라부는 결국 기내식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한데 반해 우시지마는 그런 시라부 몫의 기내식도 먹어치우는 엄청난 적응력을 보여줬다. 꼬박 12시간을 날아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숙소에 짐을 풀고 곧장 경매장으로 향했다.
둘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파방해 센서가 켜지며 경매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비치된 샴페인을 마시며 시라부가 봐두었던 그림을 기다린다. 세 번째 순서에 그가 기다리던 신예화가의 그림이 나오고 시라부가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른다.
결국 그 그림을 낙찰 받은 시라부가 주최 측과 보험처리에 대해 상의를 마치고 경매장 밖으로 나간다. 약속했던 정문에 없는 우시지마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시라부는 곧 경매장 옆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큰 몸을 접어 앉아있던 그는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조그만 새끼 고양이 둘이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치고 있었다. 늘 지니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드로잉 북에 그 장면을 옮기는 우시지마를 시라부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다 그린 우시지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놀란 고양이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골목길로 사라진다.
멀뚱히 자리에 서 있는 우시지마에게 다가간 시라부가 그의 어깨를 잡는다. 흠칫 놀라며 돌아보던 우시지마가 시라부인 것을 확인하고 어깨의 긴장을 푼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근육의 이완이 묘하게 입꼬리를 올라가게 만들어 시라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차장으로 향한다.
장시간의 비행과 옥션에서의 신경전에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시라부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위로 주저앉는다. 앉은자리에서 간신히 손만 뻗어 전화를 집어든 시라부가 룸서비스를 시킨 후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으로 향한다. 휴식보다는 찝찝한 몸을 씻어내는 게 먼저다.
물기를 털어내며 욕실 밖으로 나오니 우시지마도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늘 보던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이 아닌 그가 조금은 낯설어 쉽게 말을 걸지 못할 때, 때마침 숙소에 벨이 울리고 하우스키퍼가 룸서비스를 가져온다. 일본을 출발하고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시라부는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곧 식기를 치우고 시라부가 노트북을 켜 일을 처리한다. 옆에서 우시지마는 도화지를 꺼내 방금 전 그리던 그림을 옮겨 그린다. 몇 시간동안 노트북을 두들기던 시라부가 마지막 엔터를 쳐 일을 마무리 한다. 노트북의 전원을 끄며 바라본 우시지마는 창가에 붙어 앉아 있었다. 살며시 그의 등 뒤에 다가가 바라본 도화지속에는 파리의 야경이 담겨있었다. 화려한 불빛이 그대로 도화지에 내려앉은 것 같은 착각이 시라부가 쉽게 눈을 때지 못하게 만들고, 곧 그 시선을 눈치 챈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바라본다.
“내일 떠나나요?”
“일본으로 말입니까?”
“네.”
내일 돌아 가냐며 묻는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도화지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그 손길에 시라부는 엉겁결에 표가 없다는 대답을 해버린다. 곧 환해지는 표정을 바라보는 시라부의 귀가 붉다.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우시지마가 보지 못하게 핸드폰의 화면을 가린 시라부가 비행기 표를 취소한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하필 시라부의 얼굴 위로 내리쬔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밝은 빛을 느낀 시라부가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잠기운에 어리광을 부린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려던 시라부는 방 안에 서있던 우시지마를 보고 흠칫한다. ‘깨우러왔습니다.’ 담담하게 용건을 밝히는 우시지마를 보니 치밀던 화도 사라져 허탈한 기분으로 시라부가 욕실로 향한다. 등 뒤에 우시지마가 숨긴 드로잉 북은 미처 보지 못한 채였다.
조식을 먹고 올라온 둘이 나란히 소파에 늘어져 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둘 사이를 햇빛과 프랑스어 특유의 억양이 흘러나오는 라디오가 채워준다. 느긋하던 한 때도 잠시, 또다시 도화지와 노트북을 슬금슬금 꺼내는 둘이었다. 노트북을 켜던 시라부는 도화지를 꺼내던 우시지마와 눈이 마주친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 눈꼬리를 살며시 접은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 말한다. ‘나갈까요?’
근처의 노천 테라스 카페로 나온 둘은 결국 노트북과 드로잉북을 꺼낸다. 기껏 밖으로 나왔더니 끝이 이 모양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맞은편에 앉아 그림에 집중하는 우시지마를 보던 자신도 일에 집중한다.
한참동안 내리고 있던 고개를 들자 뒷목이 뻐근하다. 뭉친 뒷목을 주무르며 습관적으로 앞에 앉은 우시지마를 쳐다보자 그의 옆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인형같이 생긴 작은 여자아이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그림을 그리는 우시지마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 우시지마도 아이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드로잉 북의 뒷장을 넘긴다. 슥슥, 우시지마의 손이 빠르게 종이 위에서 움직이고 얼마 안가 나타나는 자신의 얼굴에 아이가 놀란 눈을 한다.
완성한 그림을 찢어 아이에게 건네주자 프랑스어로 인사를 한 아이가 웃으며 그림을 받아든다. 자신의 엄마에게 그림을 자랑하는 아이의 들뜬 목소리를 들은 시라부도 입가에 웃음을 띤다. 그의 소속 에이전시에서 안다면 기겁 할 일이었지만, 사인도 박혀 있지 않으니 괜찮을려나.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시라부가 커피잔을 쥔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운 오후였다.
저녁시간이 다 돼서야 카페를 벗어난 둘은 텐도가 적극 추천하던 라따뚜이 가게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우시지마가 천천히 걸음을 멈춘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시라부도 그의 시선을 쫓는다. 맞은편에는 세느 강의 다리가 있었다. 둘은 원래의 목적지가 그곳이었던 양 나란히 다리 밑으로 향한다.
밤이 깊은 파리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거리에 늘어선 가로등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오고 에펠 탑에서 나오는 불빛이 그 정점을 찍는다. 모든 빛들이 세느 강에 투영되는 그 광경은 쉽게 잊혀질 것이 못되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지금 그는 아마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와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연주가 섞여 정신이 아득하다.
시라부가 다리를 끌어 모아 앉아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넘기며 장난을 친다. 흘깃 바라본 우시지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중 이었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몰려와 시라부가 무릎에 얼굴을 댄다. 곧 지친 시라부의 눈이 무겁게 감기고 숨소리가 고르게 변한다.
스케치를 끝낸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부르며 돌아보려다 잠에 빠진 그를 보고 손을 내린다. 대신 연필을 쥐어 익숙하고 빠르게 그 모습을 드로잉 북 안에 옮긴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쳐다본다. 그 때, 강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넘기던 우시지마가 곧 자신의 행동에 흠칫 놀라 손을 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우시지마가 다시금 손을 댄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자신의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싫지 않아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깨운 건 한참 뒤의 이야기였다. 둘의 배경이 되어주듯 바이올린 연주자가 경쾌하게 연주하는 하이든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2번이 세느 강에 울려 퍼진다.
잠깐의 꿈같았던 파리에서의 이틀을 보내고 돌아온 일본이 낯설어 우시지마가 캐리어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옆에서 시라부가 어제부터 꺼두었던 핸드폰을 조심스레 키자 곧 미친 듯이 진동이 울려댔다. 비서가 차를 보냈다는 문자를 확인한 시라부가 우시지마를 바라본다.
“집까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태워다 드릴까요?”
“아니요, 에이전시 쪽에서 차를 보내준다 했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찾아온 정적이 어색해 시라부가 말을 던지자 예의 그 단답이 돌아온다. 시라부는 오늘따라 그 대답이 야속하게 느껴져 전혀 그래 보이지 않다는 둥,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는 둥 괜히 꼬투리를 잡는다. 토라진 듯한 시라부를 우시지마가 눈을 깜빡이며 내려다본다.
‘좋아하는 사람과 떠난 여행인데, 당연히 즐거웠습니다.’ 우시지마는 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시라부가 인지하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잠시 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시라부를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던 우시지마가 매니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공항 밖으로 나선다.
몇 번인가 뒤를 돌아보던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시라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얼굴을 감싼 시라부의 손이 발갛다. 손뿐만 아니라 귀도 목덜미도 온통 붉었다. 무슨 사람이 고백을 저런 식으로 하는지. 처음엔 잘 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와 목소리였다. 하다못해 말을 하기 전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감정을 고르는 일조차도 없었다.
입구 지척에 다다라서 멈춘 덕분인지 주변이 혼잡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울려 시라부는 차라리 주저앉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2월에 이어 3월 합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과 이해를 위해 저번 호의 글을 읽고 이번 편을 읽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모자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남은 하편까지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