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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Har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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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의 저택에 간 적이 있다.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해있던 본가와는 달리 뒤에 산을 끼고 그걸 풍경삼아 있던 저택이다.
   사람들은 산마저도 저택의 일부 같다 말했지만, 나는 산이 무서웠다. 밤이 되면 새카매져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베어 나오는 그 곳은 섬뜩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할아버지 댁을 가야하는 날이 되면 꼭 아픈 척을 했었다. 늘 실패했었지만.  

 


   정말 그 산을 마주하기 싫었던 어느 한 날이 있었다. 그날따라 유독 떼를 쓰는 나를 달래던 부모님도 나중엔 지쳐 화를 낼만큼 말썽을 부렸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도착한 저택은 여전히 나에게 크게만 다가왔다.
   도착한 내 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질릴 때쯤, 아래층에서는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즐거운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 방으로 흘러들어와 괜히 심술이 난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른들을 골려줄 생각에 몰래 빠져나간 집 밖은 이미 한참 밤이었다. 환했던 집 밖과는 달리 어두운 주변에 떨리는 다리를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숨을 곳을 바쁘게 찾았었다. 하지만 시야에 걸리는 건 산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무서워하던 산에 나는 제 발로 들어갔다. 

 

 

 


  가면 안 돼,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이미 다리는 산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는 꼭 달의 저주를 받아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이끌리듯 들어간 산 속은 어둠에 적응한 눈 덕분인지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었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고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메워 줬다.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반딧불이가 길을 밝혀주고 발이 아파 멈춰서면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그렇게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더니 어느새 산의 중턱에 도착했었다. 
  평평한 돌에 누워 바라본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이 쏟아질 것처럼 어렸던 내가 다가왔다.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 광경을 졸린 눈을 세게 비벼가며 바라봤었다. 막 서른한 개 째 별을 셌을 때였나, 결국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직도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으면서.

 


  잠에 빠졌던 것도 잠시, 얼마 못가 쌀쌀한 새벽공기에 다시 눈을 떴다. 잠의 여운을 즐기며 주변에 나있던 강아지풀로 장난을 치고 있던 중 딱딱한 돌에 몸이 점점 배겨왔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눕다 결국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었다. 
  앉은 자리에서 발장난을 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밤의 색이 남아있는 하늘이었지만 자기 전보다 밝아진 시야에 곧 아침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 밑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차가운 하늘을 천천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은 유독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많던 구름들 사이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던 해와 차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달이 내 눈에 그렇게 들어찼었다. 멍하니 그 하늘을 바라만 보던 내 귓가에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새의 울음소리와 풀냄새, 그리고 함께 있는 달과 해를 나는 쌀쌀한 새벽의 공기를 머금고 지켜봤다. 발장난을 치던 것도, 나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결과적으로 내 작은 일탈은 어른들을 골탕 먹이는 데 성공했다. 꾀죄죄한 몰골로 저택에 돌아온 나를 부여잡고 어머니는 울었다. 아주 많이.
 밤에 저녁인사를 하기 위해 들어간 방에 내가 없는 것을 보고 놀란 부모님은 곧장 사람들을 풀어 나를 찾았지만 산이 워낙 넓어 찾는 데에만 꼬박 반나절이 걸렸었다. 그 동안 짐승에게 변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나를 발견하고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바귀에서 나는 여전히 하늘만 바라봤다. 곧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를 찾았다는 무전을 친다. 조심스레 나를 이끄는 손길에 바위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이미 없었다.
  어느새 달은 사라져 있고 풀냄새도 희미해져갔다. 그 광경을 본 건 몇 초 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날 이후로 한참 동안 새벽녘에 일어났었다. 하지만 늘 무언가 부족했다. 그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아직도 그때의 아침을 기억한다. 나 혼자 처음으로 온전히 맞던 아침을.

 

Color Harmony                                              


  고층빌딩으로 빽빽한 빌딩숲 사이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유명 외제차의 마크를 달고 매끄럽게 이동한 자동차가 코너를 돌더니 바로 옆에 위치한 건물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건물의 입구에는 유려한 필체로 ‘도와 갤러리(DOWA Gallery)’ 라는 건물명이 적혀 있었다.
  갈색머리의 남자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인사를 한다.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아준 남자가 곧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열린 엘리베이터 안의 버튼은 하나 뿐으로 층수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남자가 버튼을 누르자 곧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움직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종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울리고 남자가 내린다. 이번에도 경비가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자 넓은 방 하나가 나온다. 

 


  방은 책상과 의자, 소파, 그리고 책상 맞은편에 위치한 커다란 스크린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플하기 보단 공허하다에 더 가까운 방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에는 ‘도와 갤러리 관장 시라부 켄지로’, 라는 말이 다소 건조한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시라부가 책상 옆에 있는 스탠드 옷걸이에 코트와 머플러를 건다. 한층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책상에 익숙하게 앉은 그가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시작화면에 떠있는 암호를 해제한 후 밀린 메일에 답신을 하는 시라부의 손이 바쁘다.
  며칠 전 그림을 사간 프랑스의 개인 딜러에게 막 답신을 보냈을 때 노크소리가 들린다. 다음 메일을 클릭해 읽어 내리며 시라부가 나직이 들어오라는 신호를 준다. 그 작은 소리에도 문이 열리고 그의 비서가 들어온다.  


  “관장님, 수석 큐레이터가 전시회건으로 조율할 게 있다고 합니다. 오늘 약속을 잡긴 어려우실 텐데 내일로 잡을까요?”
  “아뇨, 메일로 보낼 수 있는 거면 보내고 안 되면 점심시간에 오라고 하세요.” 
  “또 점심 안 드시면 저 회장님께 혼납니다.”

 


  하필 바쁜 날에 약속을 잡는 큐레이터에 시라부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른다.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한 시라부는 결국 점심시간을 빼버린다. 또 점심을 거르겠다는 말에 비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한다. 여전히 밀린 답신을 하며 시라부가 비서에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찾아왔나요?”
“아, 이거 회장님께서 이번 전시회 관련해서 전달하라는 서류입니다.”

 

 


  시라부가 눈짓으로 서류를 놓으라 한 뒤 마지막 메일의 엔터를 친다. 메일 보내기를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큐레이터가 보낸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는 시라부를 보며 비서가 한숨을 쉰다. 샌드위치라도 보낼 테니 끼니는 거르지 말라는 전언을 남기고는 비서가 관장실을 나간다.
 포트폴리오를 내려놓은 시라부가 뻐근한 목 부근을 주무르며 서류를 꺼낸다. 서류에는 이번 전시에 꼭 넣어야 하는 화가의 목록이 적혀져 있었다. 그걸 본 시라부가 와락 미간을 구긴다. 이 전시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면서도 이 따위 걸 보내다니. 

 


  차오르는 화를 눌러 담으며 시라부가 화가의 명단이 적힌 종이는 책상 한 편에 던져버리고 뒤에 딸려온 아버지의 전언을 먼저 읽는다. 다른 화가들은 다음 전시회에 넣어도 괜찮지만 이 화가 만큼은 꼭 넣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화가의 본명은 우시지마 와카토시, 예명은 우츠이 타카시이다. 이전에 해외 딜러에게서 스치듯이 들었던 기억을 시라부가 더듬는다. 아직 시중에 풀린 그림이 두 점뿐인 신예인데 화풍이 독특해 벌써부터 매니아 층이 생길 것 같다 했었나. 서류를 넘겨 그의 작품이 인쇄된 페이지를 펴냈다. 위 아래로 위치한 두 그림의 분위기에 곧 시라부가 목을 주무르던 손을 내린다.

 

 

 
  붓 터치부터 색감선택, 게다가 같은 수채화 그림인데도 사용한 기법까지 모든 게 다르다. 아직 화풍이 잡히지 않은 미숙한 화가로 보기엔 의도적으로 두 그림 모두가 자신의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요소들이 그림 속에 녹아있었다.  
  화풍의 독특함을 빼고도 그의 그림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 감정. 그걸 담아내는 능력만큼은 단연 천재였다. 우시지마의 그림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 뚜렷이 담겨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이 사람의 생각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이 단순한 것은 또 아니었다. 전문가가 본다면 몇 십 페이지고 미술비평을 적어낼 수 있을 만큼 분석거리가 많은 그림이다. 이건 어정쩡한 특이함이 아닌 특별함이다. 미술 쪽에 발을 들이고 현존하는 화가들 중 이만큼 존재감은 뿜어내는 화가는 없었다.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라부가 책상 위에 전화기를 들어 비서의 직통버튼을 누른다. ‘예, 관장님.’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라부가 내일의 일정을 확인한다. 내일은 해외 딜러가 갤러리에 들르는 날이라 아마 오늘보다 더 빽빽할 것이다.

 


‘내일 우시지마 화가 측과 약속 잡아주세요. 점심시간대로.’
‘예? 내일도 샌드위치는 안 됩니다.’ 
‘그럼 식당도 같이 예약해 주세요. 식사 하면서 만나는 건 괜찮죠?’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충동적으로 잡은 약속이지만 느낌이 좋았다. 저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감정표현도 뚜렷한 사람이려나. 들뜬 기색을 하던 시라부가 곧 다시 일에 달려든다. 내일 치까지 당겨서 한다면 시간을 더 낼 수 있을 터였다.  
 시라부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한층 빠르게 일처리를 한다. 그런 그의 옆으로 몇 십분 전 직원이 두고 간 시들해진 샌드위치가 처량하게 놓여있다.

 

 

 


  비서는 모르겠지만 점심과 저녁까지 꼬박 거르며 일에 매달린 덕에 아슬아슬하게 야근은 피했다. 피곤한 몸으로 도착한 주차장에는 시라부의 자동차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자동차에 올라 핸들에 머리를 묻고 잠시 숨을 고르던 시라부가 곧 차의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차를 몬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층의 오피스텔이 눈에 들어온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시라부가 발렛파킹 기사에게 열쇠를 맡기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가장 꼭대기 층에 올라가서야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넓은 복도의 끝엔 하나의 현관문만이 있었다. 
  지문을 찍고 들어간 시라부가 어두운 집안의 불을 밝힌다. 집에 도착하자 내내 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던 몸을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내려놓는다. 곧 긴장이 풀려 쏟아지는 졸음에 씻고 나온 시라부의 눈이 반쯤 감겨있다. 비척거리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짐과 동시에 수마(睡魔)에 빠져든다. 


***

 


  오랜만에 넘긴 머리가 어색한지 시라부는 머리를 매만지며 갤러리로 들어온다. 평소에는 캐주얼 정장을 선호하던 관장님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베스트까지 완전히 갖춰 입은 양복차림이었다. 그 간극에 로비에 있던 갤러리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시라부가 사라지자 곧 여직원들이 볼을 붉히며 대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관장실을 가득 메우던 타자소리가 끊긴다. 일을 시작하면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보는 성격인데 덕분에 오늘 약속에 늦게 생겼다. 일에 집중하다 무심코 본 시곗바늘의 끝은 11시와 12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고, 약속장소는 30분을 넘게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시라부가 급히 코트를 챙겨 관장실 밖으로 나선다. 
  손끝으로 초조하게 핸들을 두들기며 시라부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앞으로 몇 미터 남지 않은 거리인데 벌써 세 번째 신호에 걸렸다. 원래 잘 막히지 않는 길인데 하필 오늘따라 차들도 많다. 때마침 바뀐 신호에 시라부의 차가 식당의 주차장으로 급히 들어선다.

 

 


  미리 예약해놓은 룸으로 들어서기 전, 괜히 긴장되는 기분에 시라부가 타이의 모양을 바로잡는다. 목도 한번 가다듬고 들어간 곳에는 삐죽한 빨간 머리의 남자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어제 약속을 잡기 위해 전담 에이전시로 연락을 하자, 만남에 응하는 대신 스폰서와 꼭 함께 만나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아마 저쪽이 화가인 것 같은데. 빨간 머리에게 시라부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손을 맞잡으며 ‘텐도 사토리’라는 이름을 밝힌 남자가 곧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명함에는 시라부의 기업과 우호적 관계인 다른 기업의 심볼이 전무이사라는 직책과 함께 쓰여 있었다. 
  특이한 머리스타일 때문에 그를 화가라 생각했던 시라부가 머쓱해져 명함 끝을 매만진다. 그나저나 텐도그룹이라니, 꽤 거물이 나왔다. 저쪽 회장이 아버지와 대학 동창이어서 집안끼리의 왕래도 잦고 임원들의 얼굴도 대부분 익혀 놓았는데, 저 괴짜 같은 남자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안녕하세요, 텐도 사토리입니다. 시라부 군은 저를 처음 보겠네요, 저는 아니지만.”
“저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여전히 귀염성 없는 얼굴과 말투네요.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시라부 군이 여섯 살 쯤 이었을까요? 가족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기억하지만 시라부 군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날이 제가 그 지루한 가족모임에 마지막으로 참가한 날이었으니 그 후론 볼 일도 없었겠지요. 텐도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다.
  아버지들끼리의 친분 덕에 연말마다 두 집안이 만나서 식사하는 날이 있다. 아버지들끼리만 신나고 나머지 모두는 어색함과 불편함에 식사 후 꼭 소화제를 들이키는 자리이다. 가족 모두가 참가해야하는 자리였고 텐도 가(家)는 남자 형제 둘만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텐도 가(家)의 자녀 중 남자가 한명 더 있었다니. 텐도가 그런 시라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텐도는 집안의 막내로 위에 형이 둘이나 있어 자연스레 후계자 자리와는 멀어졌다. 본인 자체도 그런 복잡한 일에는 관심도 없고 덕분에 형들과는 다르게 자유롭게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어린나이에 유학을 가고, 조금 더 머리가 큰 후에는 틈만 나면 외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텐도는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다 와카토시를 만났다.

 


  여느 때처럼 텐도가 라따뚜이가 먹고 싶다며 수행 비서를 괴롭히던 날이었다. 결국 프랑스로 가 식사를 마치고 기분 좋게 포만감을 즐기며 세느 강 주변을 걷고 있을 때, 텐도는 낡은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던 동양인 소년을 발견했다. 
  가까이서 본 소년은 잘 먹지 못한 듯 비쩍 마른 몸에 허름한 차림새였다. 그의 앞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체와 어수룩한 불어로 세느 강 풍경을 그려준다는 푯말이 놓여있었다. 호기심으로 그림을 그린 텐도는 받은 그림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눈을 뗄 수 없는 그림이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은 둘째 형이 자랑하던 아버지가 주셨다는 그림보다 훨씬 빛나보였다.
  연필 하나로, 검은색 하나로만 그린 그림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물빛으로 반짝이던 세느 강이 보였다. 수행 비서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자 늘 무표정이던 비서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퍼진다. 옆에서 아직 그림 값을 받지 못해 눈치를 살피던 소년의 손을 텐도는 덥석 잡으며 말했다. 자신과 함께 가자고. 

 

 


***

 

 


 -그렇게 제가 천재화가 우시지마를 발견하고 여기까지 키워낸 것입니다! 텐도가 연극투로 과장되게 말을 한다. 묻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서 풀어내던 텐도가 마지막 말을 하며 우시지마의 어깨위로 손을 올린다. 묵묵히 식사만 하던 우시지마가 물음표를 띤 얼굴로 그 손을 쳐다본다. 


  텐도 사토리는 말 많고 시끄러운 남자였다. 시라부와는 정 반대의 타입이었고 그가 가장 귀찮아하는 인간 부류들 중 하나였다. 억지로 얘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쳐주는 시라부의 입가에 경련이 인다. 그렇게 시라부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한참을 혼자 말을 쏟아내던 텐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겉옷을 챙겨 일어선다.
  식사를 하던 둘의 시선이 텐도에게 집중되자 ‘뒤에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군요. 이탈리아에서 저녁약속이 있거든요. 그럼 시라부 군, 다음에 또 만나죠. 우리 와카토시 군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을 하며 방을 나선다. 

 

 


  어쩐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에 시라부의 표정이 멍하다. 정신을 다잡고 마주본 앞자리에는 우시지마가 막 버섯조림을 입에 넣고 있었다. 시라부는 이미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셔벗까지 먹은 후였는데 우시지마의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시라부는 텐도가 사인용 코스요리를 주문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 번째 녹차를 마셨을 때, 드디어 우시지마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에 맞춰 시라부가 찻잔을 내려놓자 작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우시지마가 처음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저 멀뚱히 바라만 보는 우시지마에 시라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태연한 표정과는 다르게 머릿속으로 할 말을 맹렬히 훑던 시라부가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만 일어날까요.”
“-아, 네.”

 

  계산하러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시라부가 빌지를 챙겨 룸 밖으로 나간다. 다소 성급한 걸음걸이로 카운터에 카드를 내민 시라부가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선이 굵은 그 얼굴과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낮은 저음에 순간 대답이 늦어져버렸다. 괜히 머리를 넘겨서는, 손끝에 닿아오는 귓불이 뜨겁다. 

 


  계산을 마치고 나간 가게 앞에 우시지마는 없었다. 혹시 길이라도 엇갈렸을까 이곳저곳을 살피는 시라부의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곧 시라부의 시선 끝에 근처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검은색 뒤통수가 걸린다.
  달려가 팔을 붙잡자 의아한 얼굴의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쳐다본다. ‘그쪽도 버스타고 가십니까?’ ‘예?’ 시라부가 저도 모르게 말을 되묻는다. 저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아무래도 우시지마는 식사를 마친 걸로 약속도 끝났다고 생각했나보다.
  또다시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머리를 짚은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팔목을 잡고 주차장으로 끌고 간다. 뒤에서 당황한 우시지마가 몸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이 차 조수석에 그를 밀어 넣는다.

 


  덩치는 쓸데없이 커서 힘만 세다. 옆에서 황당한 듯 보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라부가 아려오는 팔목을 주무르며 차의 시동을 건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시라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제가 시간당 처리하는 일들이 얼마나 될 거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리한 일들의 가치를 돈으로 매긴 다면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때마침 바뀐 신호에 시라부가 고개를 돌려 우시지마를 쳐다본다. 입까지 살짝 벌어진 채로 돌아본 우시지마의 표정은 여전히 태평하다. ‘저는 오늘 우시지마 씨를 만나려고 어제는 밥도 굶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밥만 먹고 헤어지다니. 수지타산이 맞지를 않군요.’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시라부가 말하지만 우시지마는 여전히 영문 모를 얼굴이었다.
 

“작업실이 어딥니까.”

“예?”
“화방 말입니다. 개인 화방 정도는 있을 텐데요?”
“아.”


  단조로운 어조로 흘러나온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으며 시라부가 다시 액셀을 밟는다. 우시지마의 작업실은 이 부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며 시라부가 액셀을 다시 한 번 세게 밟는다.

안녕하세요, 이번 「 월간 우시시라 」 2월 호에 참가하게 된 작가미상입니다. 미숙한 글이지만 읽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첫 합작, 월간 참여라 평소보다 더 긴장하고 쓴 글이네요. 여러모로 총대님께 도움을 많이 받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총 세 번 원고를 엎은 끝에 고른 컨셉인 만큼 공을 들이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 한 호에 다 싣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 돼 부득이하게 글을 상, 중, 하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주제로 잡았던 ‘꿈’도 결국 빼버린 채 자유주제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림에 한해서만 감정이 풍부한 화가 우시지마와 어린 시절 스치듯 본 달과 해가 있는 아침을 잊지 못해 갤러리 관장이 된 시라부, 둘이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들을 지켜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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