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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끝 2

​말랑

***

시라토리자와는 도쿄 진출을 결정지었으나 부 전체 분위기는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학교로 돌아와 짧은 평가회를 마친 뒤 우시지마를 제외한 부원들은 모두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는 코치와 감독의 서릿발 같은 꾸지람에, 우시지마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잘못했다고만 할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부원들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체육관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생각에 잠긴 우시지마의 옆에 누군가가 앉는다. 텐도였다. 

 

와카토시 군, 시라부를 좋아해? 

 

한참 있다가 터져나온 질문에, 고개를 들어 텐도를 바라보는 우시지마의 동공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소리없는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텐도는 우시지마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나 보네. 그런데 왜 그랬어? 좋아하면 아껴줬어야지. 우시지마는 고개를 떨군다. 시라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고, 카와니시뿐만 아니라 시라부한테도 분노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치밀어올랐다고. 사실을 이야기하려니 자신의 옹졸함이 너무 부끄러워져서, 우시지마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텐도는 한참 조용하다가, 왜, 카와니시 때문에 그러는 거야? 질투 나서? 하며 또다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져왔다. 우시지마는 묵묵히 있다가, 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시지마는 텐도에게 지금 제 상태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지금 안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저도 처음 겪는 생소한 것이라, 이야기를 하는데 자꾸 말이 끊겼다. 아마 자신의 옹졸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왔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텐도는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못한 건 본인도 아는 것 같으니까 딱히 입을 대고 싶지는 않지만, 우시지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땅바닥에 무거운 시선이 내려앉았다. 네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우시지마가 텐도를 쳐다본다. 그렇지만 내 입으로 말해줄 순 없는 거라서. 역시,

 

빨리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힘내, 와카토시 군. 우시지마의 어깨를 툭툭 두르린 텐도는 먼저 가 보겠다며 휘적휘적 사라졌다. 그 뒤로 성급하게 시라부를 만나려 한 게 잘못이었을까.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문자를 가볍게 무시했고, 전화는 받지도 않았으며 멀리서도 우시지마를 보면 다른 길로 피해갔다. 그래. 

 

시라부는 조금 달라졌다. 아니, 많이 달라졌다. 부활에서도 우시지마에게 아는 체조차 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도 모르는 척 넘겨버리면서. 누구도 시라부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행동을 모두 목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우시지마는 점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부활이 끝날 때쯤에 시라부, 하며 앞을 막아선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고 저를 올려다보며 묻는 눈동자는 죽어있었다. 옅어진 향에는 미묘하게 소금기 어린 냄새가 섞여있었다. 그래서, 우시지마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배. 우시지마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눈만 끔뻑인다. 동그란 눈동자는 한참동안 저를 쳐다보다가, 미련없이 휙 돌아섰다. 할 말 없으시면 가 보겠습니다. 이대로 시라부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큰 걸음으로 앞질러 가서 시라부의 앞을 다시 막았다. 미안하다, 시라부. 터져나온 사과에 비껴 가려고 하던 시라부가 멈춰섰다. 우시지마의 눈을 바라본다. 마주친 눈이 묻는다. 

 

뭐가, 말입니까?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자신이 시라부에게 한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한참 우물거리다가 어렵게 입술을 떼어 다미안하다, 라고 하자 시라부는 피식 실소를 내뱉는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십니까. 선배가 저 싫어하시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그 말을 들은 우시지마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시라부가 한숨을 뱉으며 쓸쓸하게 웃었다.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티가 났는데. 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끔벅거리며 쳐다보자, 시라부도 우시지마를 올려다본다.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싫으셨으면, 저만 괴롭히면 되지, 왜 다른 부원들한테까지 그러셨습니까. 

 

응? 갑작스레 짙어진 향이 우시지마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시라부에게 묻는다. 그게 무슨...? 시라부가 헛웃음을 짓는다. 뭐, 상관없어요, 이제. 다 의미없는 일들이니까 그만두죠.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심도 아니시잖아요. 시라부, 그게 아니라... 가보겠습니다. 할 말만 툭툭 내뱉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시라부의 모습은 전에 없이 야위어 있었다. 

 

 

 

 

***

미안하다며 저를 붙잡는 우시지마에게서는 강렬한 꽃향기가 풍겼다. 향수인가 보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향수를 사서 쓸 사람은 아니니, 누군가한테 선물받은 건가. 애인인가. 휙휙 스쳐가는 생각들에 시라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정말로, 내가 끼어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구나. 시리도록 아픈 깨달음이 시라부의 가슴을 때렸다. 그래도 우시지마의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헛된 희망을 품었던 저를 저주한다. 찢어진 마음은 제가 살기 위해 가시를 삐죽삐죽 세우기 시작했다. 우시지마가 내뱉는 말들은 모두 고깝게만 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그 자리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여과없이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 우시지마의 놀란 표정도, 머뭇거리는 목소리도, 모두 아팠다. 마음은 쥐어짜는 것마냥 아픈데, 강하게 풍겨오는 붉은 냄새가 정신을 온통 흩뜨렸다. 자꾸 향수를 선물했을 누군가가 생각나 배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뒤틀렸다. 돌아서서 눈물을 삼키며 시라부는 다짐했다. 인정하자. 저 사람은,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내게 힘든 사람이야. 그만하자. 그만 접어버리자. 

 

시라부는 다음날부터 연습을 나오지 않았다. 명쾌했던 것들은 죄다 헝클어졌다. 이리저리 얽힌 실타래 끝에는 반드시 시라부가 있었고, 우시지마는 그걸 풀어낼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웠고, 시라부와 다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카와니시에게 시라부에 대해 물었는데,

 

걔는 왜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야기 다 끝났다던데요.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해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생전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던 우시지마의 얼굴이 충격으로 븕게 물들었다. 기분이 어때요? 비아냥거리는 카와니시를 노려본다. 무슨 짓이지, 카와니시 타이치. 당신이 걔한테 한 짓이잖아. 카와니시가 그르렁거렸다. 우시지마가 뭔가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카와니시가 우시지마의 멱살을 잡았다. 오해 같은 소리 하네. 어디서 시라부를 찾아. 꺼져요. 상황이 심상찮아지자 지켜보던 부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참아. 부원들이 카와니시를 떼어내려 했지만 카와니시는 살벌한 눈빛으로 방관자 새끼들, 니들도 다 똑같아, 하며 욕지거리를 짓씹듯 내뱉었다. 우시지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에 휩싸인 카와니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혹시 너는, 하고 입을 뗐을 뿐. 그 말에 카와니시의 이성이 끊어졌다. 닥치라고! 소리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려는데 3학년들이 달려와 카와니시를 떼어냈다. 카와니시는 이거 놓으라고, 죽인다고 소리지르며 버둥거렸으나 결국 체육관 밖으로 끌려나갔다.

 

부원들은 카와니시의 편도 우시지마의 편도 들지 않았다. 카와니시는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인 채 체육관으로 돌아왔고 텐도는 우시지마를 쿡쿡 찌르며 큰일난 거 아니냐고, 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우시지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꼭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해야 하는데. 오해를 플어야 하는데. 결국 며칠 더 수소문한 끝에 겨우 시라부를 찾아냈다. 그리고

 

저 배구부 나가겠습니다. 나갈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 잠깐만, 이게 아닌데.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다시 미안하다고 하고, 고백할 생각이었다. 내 방법이 잘못되어서, 네게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나는 너와 같은 마음이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붙잡아야 하는데. 

 

그러나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잡지 못했다. 

 

 

 

***

몇 년을 끌어온 첫사랑이 끝났다. 잔인한 이가 짓밟고 간 내 마음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애써 눈물을 삼키며 우두커니 서있는 우시지마를 외면하며 자리를 벗어난다. 복도 끝에 있던 카와니시를 본다. 시라부는 동그란 눈을 하고 잠시 자리에 멈춰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카와니시를 향해 걸어왔다. 

 

야, 너 괜찮은 거냐.

 

카와니시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무는 제 친구를 보고 걱정스레 묻는다. 괜찮아. 존나 쌩쌩해. 갈라지는 목소리에는 소금기가 배어 있었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고, 멍청아. 고집스레 저는 괜찮다고 주장하는 시라부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카와니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말없이 걷다가 시라부가 입을 열었다. 카와니시 타이치. 응? 왜 왔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카와니시는 입을 다문다. 그게... 사실 카와니시 본인도 모른다. 왜 따라갔지. 그냥, 일단은 켄지로는 내 친구니까. 그리고.. 세미 선배가 가 보라고 했지. 큰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이 시라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지 말지 그랬냐. 무슨 좋은 구경 났다고 보러 와. 쪽팔리게.

 

친구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아 세게 짓씹은 입술에서는 비린 피맛이 났다. 카와니시는 말이 없었고, 시라부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카와니시가 건네준 음류수를 들고 발에 채이는 돌멩이들을 툭툭 걷어찬다. 우시지마 상, 끝까지 잔인했지. 이제 와서 답지않게 다정한 척이나 하고. 그 놀란 표정은 또 뭐람. 짜증나. 그 사람 좋아하는 거, 그만두길 잘했어.

 

 

근데

왜 자꾸 

울고싶어

지는거지

?

 

 

시라부는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닦았다. 카와니시는 말없이 시라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내 시라부는 등을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당신을 향한 내 마음에서는, 언제나 피 냄새가 났습니다. 내쳐지고, 부딪히고, 베이고, 맞아. 나는 당신이 날 아무리 함부리 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언제나 처음 봤을 때의 그 색깔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그건 제 오만한 착각이었던 겁니다. 피비린내였어요. 제 피 냄새에 제가 취해서,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볼을 타고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시라부의 발끝에 검은 꽃을 피워냈다. 그 모양이 갈기갈기 찢어진 제 마음 같아서, 너무 아파서.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한참 앉아있었을까. 발끝에 걸린 그림자가 길어졌다. 시라부는 엉망이 된 얼굴을 소매로 쓱쓱 닦고는 수돗가로 가서 세수를 한다. 남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카와니시가 너 정말 괜찮아? 걱정스레 물어왔다. 시라부는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엄청 두들겨맞았다며. 세미 선배가 뭐라고 안 해? 하며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우물쭈물 대답하는 카와니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쉰다.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야. 니가 자꾸 그러면 선배 입장은 뭐가 되냐. 우시지마 선배 편도, 니 편도 못 들 텐데. 그만해. 나 괜찮으니까. 말을 마치며 시라부가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추궁하듯 바라보는 시라부의 시선을 피하며, 카와니시가 시라부의 어깨를 툭 치곤 앞서 간다. 나 숙제 있어서 먼저 간다. 이따 봐.

 

카와니시가 기숙사 쪽으로 사라진 뒤, 시라부는 감독님을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먹었다. 모처럼 자유로워졌는데. 수고한 나한테 선물이나 주자, 하는 마음으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영화나 볼까. 새로 개봉한 거 재밌다던데. 이어폰을 끼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대충 흥얼거리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아, 날씨 좋다. 열린 창 사이로 바람이 불어들어와 시라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아프긴 해도, 이렇게 후련한데. 눈을 감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시라부는 오랜만에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시선의 끝은 이번 편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글이 너무 안 써져서 결국 분량이 짧아졌습니다ㅠㅠ 다음 편으로 끝납니다...! 읽어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전편을 읽으셔야 전개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1편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keeponly1ove.wixsite.com/monthly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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