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He's Dreaming
설화
태초의 신은 여러 신을 만들었다. 해의 신, 달의 신, 별의 신, 이 행성을 지키는 행성의 신과 이런 신도 있어? 할 정도로 잡다한 신들까지. 그들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는 대신, 간접적인 영향은 줄 수 있었다. 그게 낮과 밤이고, 밤하늘의 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등이었다. 낮과 밤이 생김으로써 인간들의 시간이 정해졌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함으로써 여러 감정이 생겨났다. 신들은 절대 인간의 삶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시라부 켄지로는 달의 신이었다. 시라부 대의 다른 또래 신들은 능력을 계승 받지 못했고, 능력을 계승 받은 시라부 홀로 신의 일을 해왔다. 다행스럽게도 시라부의 후대에는 여러 신이 능력을 계승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일을 후대에 넘기지 않았다. 시라부가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죽고 싶지 않아서였다. 달의 신들은 제 일을 후대에 물려주고 업적에 따른 며칠의 자유를 얻은 후, 천계에서 조용한 죽음, 공식적인 은퇴를 맞이한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달의 신의 선대는 볼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신은 달의 신과 오래 살아온 몇몇뿐이었다.
달의 신이 하는 일은 태양의 눈부심이 사라진 밤, 달의 은은함을 푸는 것이다. 가끔은 꿈의 신의 일을 도와 인간에게 꿈을 풀어주기도 했다. 시라부는 이 일을 사랑한 동시에 원망했다. 자신에게 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더 자유롭게,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자신 외에도 능력을 지닌 신이 있었다면 외롭지나 않았을 것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과 함께 외로움에 사무치는 밤이면 평소보다 어두운 달빛이 하늘에 맴돌았다. 구름의 신은 이런 시라부의 상태를 눈치채고 몇 번 어두운 달빛을 자신의 구름으로 가려 주곤 했다.
“켄지로. 좀 쉬는 게 어때? 눈 밑이 퀭한데.”
“알잖아, 타이치. 난 쉬는 것도 후대에 맡기는 것도 싫어.”
“창조신의 지시야. 일주일간 후대에 맡기고 쉬다 오래.”
“하? 뜬금없이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뭐 어때. 내가 인간계 구경시켜줄게.”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카와니시 타이치는 신의 능력을 받지 않은 시라부 또래의 신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 시라부의 심정을 잘 이해해주고 곁에 있어준 친구였다. 인간계에 다녀오면 그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달의 은은함을 더해주기도 했다. 시라부는 제 일 다음으로 카와니시의 인간계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카와니시가 밤중에 찾아와 이야기해줄 때면 검은 하늘의 달은 더 은은하고 밝게 빛났다.
구름 위에 널브러져 햇빛을 받고 있던 시라부는 벌떡 일어나 자택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내려가는 인간계에 시라부는 자신이 들떠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일을 계승 받기 전을 마지막으로 인간계에 갔었으니, 벌써 천 년도 전의 일이었다. 제 옷장에는 얼마 전 자신이 바라본 인간계의 옷과는 다른 옷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구나. 새삼 세월을 실감한 시라부는 옆 방에 있는 자신의 후대인 고시키의 옷장을 열어 가장 익숙한 옷으로 골라 입고 나왔다.
“켄지로, 그거 츠토무 옷 아냐?”
“맞긴 한데, 뭐 어쩔 거야. 걔가 나한테 덤빌 수나 있나.”
“와, 권력 남용하는 거 봐.”
그간 나누지 않았던 대화를 나누며 둘은 인간계로 내려왔다. 내려온 둘은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시라부는 항상 내려다보던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시라부는 카와니시를 따라 걸어가고는 있지만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따라가는 데 지친 시라부가 잡고 있던 카와니시의 손목을 놓고 멈춰 섰다.
“타이치, 대체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인간계에 왔을 때, ‘배구’라는 운동을 봤는데 그게 꽤 재밌었다고. 오늘 경기하는 날이더라.”
그러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시라부가 괜히 투덜거렸다. 카와니시는 투덜거리는 시라부의 입에 음료수 하나를 물려준 후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 걸어가지 않아 꽤 커다란 체육관이 나왔다. 카와니시는 익숙하게 체육관의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시라부는 그런 카와니시를 따라가느라 바빴다.
관람석에 들어온 둘은 적당히 경기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카와니시는 배구를 전혀 모르는 시라부에게 배구에 대해 설명해주느라 바빴다. 결승전에는 센터 코트라 하여 경기장에 코트가 하나만 존재했다. 덕에 카와니시와 시라부가 시선이 분산될 일이 없어 편했다. 흥미있어하는 카와니시와 달리 시라부는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신경하게 코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5세트, 시라토리자와 팀의 세트포인트였다. 시라부는 이제 경기 끝나겠네, 하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시라부의 눈동자에 스파이커의 모습이 가득 찬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힘의 강렬함과 아름다움은 시라부의 시선을 사로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 스파이커가 스파이크를 친 후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심판이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스파이크를 마지막으로 시라토리자와, 전국 행을 확정 짓습니다!]
관중석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라부는 그런 함성 속에서 멍하니 우시지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득점과 동시에 승리가 확정 나자 우시지마가 굳은 표정을 풀고 그제야 웃었다. 그 순간 시라부는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카와니시는 움직이지 않는 시라부의 팔을 툭툭 쳤다. 시라부가 그제야 앉았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방금 뭐였지, 시라부는 멍하니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시라부는 강제휴가 이후로 넋 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일상이 됐다. 카와니시는 수백 년 동안 시라부를 봐왔지만 이런 시라부는 처음이라 낯설었다. 시라부는 천계로 돌아와도 계속해서 우시지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둘러보았던 인간계는 흥미로웠지만, 우시지마의 스파이크만 못했다. 시라부는 구름을 우시지마의 형태로 만들다가 이내 흩뜨렸다. 시라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와니시에게 말했다.
."타이치, 나 은퇴할까."
"……뜬금없이? 왜, 일이 지겨워졌어?"
그건 아닌데, 이렇게 아플 바엔 죽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아. 시라부가 마저 중얼거렸다. 죽기 싫으니까 은퇴 평생 안 할 거야! 하고 외치던 은퇴하면 얼마간의 자유를 가질 테니 그때는 그의 얼굴을 붙잡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시라부의 작고도 헛된 희망이었다.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적이며 움츠리는 시라부를 카와니시는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은퇴하지 않고 그와 만날 방법은 없을까. 시라부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스파이크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스파이크의 강함은, 그 자세의 아름다움은 시라부 뇌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심장이 세차게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시라부는 자신에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 고시키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불린 고시키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시라부에게 다가왔다. 고시키가 다가오자 시라부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고시키, 오늘부터 0시부터 5시까지의 내 일은 네가 맡아."
"어…은퇴, 하시려고요?"
"아니, 은퇴는 안 해. 따로 할 일이 있어 네게 맡기니, 잘해."
제 일 일부를 고시키에게 맡기면서까지 시라부가 결정한 것은 그날 봤던 선수,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간계로 다시 내려갈 수 없기에 그의 꿈에서라도 함께 하겠다는 것이 시라부의 마음이었다. 시라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행동은 부질없는 짓이다. 수백 번을 그의 꿈에 들어가 함께 한다고 해도 우시지마는 절대 시라부를 기억할 수 없다. 운 좋게 그가 꿈을 기억한다고 해도, 시라부의 생김새와 같이 세세한 것은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시라부는 그렇게 해서라도 우시지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시지마의 꿈에 처음 들어간 날 이후, 시라부는 우시지마의 꿈속에서 함께한 것은 자신의 수천 년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시지마의 꿈속에서 그는 한없이 다정하기도, 무심하기도 했다. 시라부는 여러 면의 우시지마를 보는 것을 즐겼다. 꿈속에서 시라부는 꿈에서 우시지마의 친구, 학교 후배, 더 나아가서는 연인이 되기도 했고, 평생 느끼지 못했을 행복을 그와 함께 누렸다. 시라부는 자신의 욕심이 점점 더 커짐을 느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꿈에 들어갈 때의 단점은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 단점마저도 우시지마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영향을 받는 쪽은 시라부 뿐이었다. 우시지마에게 있어서 시라부는 ‘기억도 안 나는 꿈속의 인물’일 뿐이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자신을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자신의 큰 욕심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라부는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결국 시라부는 천계의 신들을 불러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존재는 시라부가 계승 받은 이후로 계속 반대해오던 은퇴를 실행시켰다. 시라부는 그간 해온 일의 결과 덕에 공식 은퇴까지 14일의 자유를 부여받았다. 카와니시는 발표를 마친 후 나가는 시라부를 붙잡고 물었다.
“켄지로, 진심이야? 후회 안 해?”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직접 만나고 싶어. 내, 욕심이지.”
카와니시는 그제야 시라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차렸다. 시라부는 이제야 알려줘서 미안하다는 듯 카와니시의 어깨를 도닥였다. 시라부는 은퇴를 고민하던 때에 비해 한결 후련해 보였다. 카와니시는 그 얼굴에 차마 잔소리를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넌 바보야, 카와니시의 말에 시라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자유를 얻고 인간계로 내려간 시라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우시지마를 찾는 일이었다. 학교 규모가 크고, 청소년 대표 국가선수인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찾는 것은 생각외로 쉬웠다. 그가 학생인 탓에 시라부는 팔자에도 없는 인간 학생 노릇을 해야 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아까웠다. 하루라도 낭비하기 싫어 매일 그가 연습하는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습을 마친 우시지마에게 수건을 내밀거나 음료수를 건네며 우시지마에게 말을 걸었다. 시라부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아도 같은 땅을 밟고 있음에 만족해했다.
시간은 붙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흘러 시라부의 공식적인 은퇴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시라부는 내일이 지나면 인간계로 올 수도, 우시지마의 꿈으로 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거리도, 우시지마의 낮은 목소리도 모두 마지막이다. 우시지마에게 건네는 음료도 다시는 줄 수 없다. 시라부는 체육관에서 나오는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시라부가 입을 열었다. 이해 못 할 시라부의 말에 우시지마가 시라부를 내려보았다. 어깨의 힘을 빼고 축 늘어뜨린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앞에 다가가 팔을 벌리며 말했다.
"우시지마상, 저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상관은 없다만, 괜찮은가."
“네, 그거면 돼요.”
우시지마는 허리를 숙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라부를 안았다. 우시지마의 품에서 시라부가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이 기억만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괜히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참으며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서 떨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라부에 우시지마는 이 모습을 어디선가 많이 봤던 것 같다고 느꼈다. 시라부는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우시지마에게 물었다. 여전히 제가 기억나지 않죠? 슬픈 미소를 지으며 묻는 그 말이 둘의 가슴을 쑤셔왔다. 그의 대답을 시라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것 같다. 미안하다.”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시라부는 비참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난 당신에게 평생 중요한 사람이 되지 못할 테니까요. 시라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미처 하지 못한 고백이 시라부의 입에서 맴돌았다. 이별이 다가왔다.
첫사랑의 상처는 생각보다 쓰렸고, 그 고통은 생각보다 깊었다. 천계로 돌아온 시라부는 앞에 있지도 않은 우시지마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이내 손을 내렸다. 평화로운 죽음. 시라부는 평화로운 죽음이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라부는 자신이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옆에 서 있을 수 있던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거면 됐어. 시라부가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다가오는 은퇴에 별생각이 없었다. 시라부의 머릿속에는 우시지마만 가득했다.
은퇴가, 시라부의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카와니시가 시라부의 침실로 달려왔다. 문을 연 카와니시는 평화로이 눈을 감고 있는 시라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시라부의 눈을 감은 얼굴은 은퇴 선언을 하고 나서의 표정과 겹쳐 보였다. 후련해 보이는, 얕은 미소가 번져있는 얼굴. 멍청한 자식. 시라부의 욕을 중얼거리던 카와니시는 한숨을 뱉으며 시라부의 손을 내려놓았다. 시라부의 은퇴를 알리는 카와니시의 목소리가 덤덤했다.
“달의 신, 시라부 켄지로는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을 알린다.”
켄지로가 또 그의 꿈에서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좋겠네. 카와니시가 조용히 읊조렸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스토리라던가 모두 정해놓고 쓰기 시작했는데 다 쓰고 읽어보니 모에사한 시라부같네요...제 능력 부족을 탓해야지요..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