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하얀 새벽을
여는 사람
예령
일곱 살 때,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아이와 말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말로 놀리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내 신발을 밟은 그 아이의 행동에 화가 잔뜩 났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아이를 밀쳐 버렸는데, 울먹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오히려 엉덩이를 털고는 내게 힘이 약하다며 빈정거렸다. 그리고 곧장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의 부모님에게 달려가 고자질까지 했다. 얄밉게도 태도를 싹 바꿔서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아이에게 사과를 하라고 타이르는 말에 내가 싫다고만 하자, 부모님은 나 대신에 사과를 하고 쇼콜라티에인 자신들이 만든 초콜릿까지 들려서 그 아이를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와 호되게 혼이 났다. 어머니는 나에게 벽을 보고 무릎을 꿇은 뒤 손을 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들면 손을 내리라고 한 뒤 어머니는 방을 나갔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 방에 들어온 아버지가 손은 내리고 이제 그만 저녁을 먹으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으니 손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날 나는 난생 처음 종아리를 맞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의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아이에 대한 증오가 부모님에게까지 퍼진 것이었다. 잘못은 그 아이가 했는데 나를 혼낸 것에 대한 분노였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미워졌다. 어린 나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화나게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 완벽한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나를 멍하게 만들었던 어머니의 한 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멋진 작품이구나, 켄지로!
부모님의 가게에서 제일 비싼 초콜릿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흰 상자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그 초콜릿은 하루에 딱 다섯 상자만 판매하며, 그것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가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새벽, 아래층 가게 주방에 있던 부모님의 눈을 피해 흰 상자 다섯 개를 소중히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초콜릿들을 꺼내서 손에 꽉 쥐었다. 뭉개지고 녹아내리는 초콜릿들을 손으로 비빈 뒤에 스케치북에다 손바닥을 내리눌렀다. 초콜릿색의 손자국이 종이를 채워나갔다. 스케치북은 몇 장 더 넘어갔고, 나는 세 번째 상자를 뜯으려다가 그만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오신 부모님이 내가 한 짓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셨는지는 보지 못했다. 눈물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던 탓이다. 혼이 날 것이라는 두려움과, 부모님은 내가 한 행동에 화나 나셨을까 하는 궁금함과, 이런 짓을 왜 했을까 하는 후회가 뒤섞였다. 아버지가 스케치북을 넘기는 소리에 눈을 뜨자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내가 한 최초의 반항을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내 얼굴에 묻은 초콜릿들을 닦아 주었다. 며칠 후에 내 손바닥이 찍힌 종이 다섯 장은 가만 테두리의 액자 안에 들어가 부모님의 침실 벽 한 쪽에 걸리게 되었다.
내 앞으로 특이한 의뢰가 들어왔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거절할 것이라고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가게는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빴고, 의뢰는 부모님이 가끔 지인을 통해서만 받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앞에 형용사도 붙어 있었으니-특이한.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피곤한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의뢰인이 보내온 서류도 예의상 들춰 봤을 뿐이었다. 그의 지나치게 자세한 계획서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연히 그 의뢰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의뢰인의 이름은 우시지마 와카토시. 서른한 살의 그래피티 작가. 그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서양의 문화라고 여겨졌던 그래피티에 확실한 발자국을 내고 있는 동양인 작가라며 국내 언론은 침이 마르게 그를 칭찬했다. 해외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개인전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예술가일 것 같은 인상을 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키는 작품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 다음엔 외신 자료도 몇 번 찾아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예술 잡지 인터뷰에서 고향이 미야기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해의 반을 외국에서 보내지만, 집은 여전히 미야기에 있고, 앞으로도 미야기에 살고 싶다고 했다. 그걸 보고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에게 친근감도 느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작가가 계획한 이번 프로젝트는, 착한 초콜릿의 소비를 권장하는 그래피티를 발렌타인데이에 맞춰 초콜릿을 많이 소비하는 10개국에 설치 및 전시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보낸 계획서에 따르면, 그는 이번 그래피티의 재료로 녹인 초콜릿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내가 한 것처럼 초콜릿을 녹여 물감처럼 쓰겠다는 계획이었다.
내 역할은 그가 작업하기 좋게 초콜릿을 녹여서 일정한 모양으로 굳히는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귀찮은 일이었다.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이 일까지 하게 된다면 일주일에 한 번은 기상 시간을 한 시간 정도 앞당겨야 해야 했지만, 나는 계획서를 몇 번이나 읽고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뉴욕에서의 개인전을 마치고 어제 귀국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한 시. 그는 지금쯤 점심을 먹은 후에 잠깐 쉬고 있을 것이다. 모두 그의 계획서 맨 뒷장에 쓰여 있는 내용이었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지금 전화해 내 의사를 알려야 했다. 신호는 길지 않았다.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우시지마 와카토시 씨 되십니까? 저는 쇼콜라티에인 시라부 켄지로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장한 번호가 아니어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통화는 간결하게 전개되었다. 계획서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우시지마 씨의 의뢰를 수락한다는 걸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펜을 들고 종이에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말하는 것들을 휘갈겨 썼다. 그는 계획서에 쓰인 것들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나는 안 보이는 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가게 방문은 매주 월요일 오전 여덟 시. 직접 와서 가져갈 계획임. 손에 쥐기 쉬운 가는 막대 모양, 벽돌 같은 직사각형. 그가 요구하는 모양에는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으로 별표까지 했다. 그는 나에게 다음 주 월요일에 가게로 가겠다고 했다. 다음 주 월요일이라면 사흘이 남았다. 미리 모양을 만들어 사용하기 쉬운지 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가게 위치는 아시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라부 씨."
펜 뚜껑을 입에 물고 메모한 것들을 살피던 나는 잠깐 생각했다. 시라부 씨? 확실히 초면에 그보다 더 좋은 호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도 우시지마 씨라고 해야 했다. 어째 쉽게 뱉어지지는 않았다.
"아뇨. 저야말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시지마 씨."
* *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힐끗 시계를 살폈다. 첫만남에 늦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제대로 봤다면 그는 2분 정도 늦은 상태였다. 가게에 제 시간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내리는 것만 해도 1분은 걸릴 텐데. 원래 이런 사람인가 싶어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철저하고 꼼꼼한 사람인 것 같았다. 예술가는 원래 조금 개방적이고 즉흥적이지 않나? 나는 이런 것도 편견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올려놓은 상자를 열고 우시지마 와카토시 작가에게 설명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그는 나에게 대뜸 일하는 곳이 부모님의 가게냐고 질문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것 외에 다른 모양도 몇 개 준비해 봤어요. 앞으로는 쓰기 편하신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번거롭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나는 우시지마 씨의 옆에 서서 상자를 여는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는 막대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며 무게를 가늠하기도 하고 구 모양의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조금 눌러 보기도 하며 내가 준비한 여섯 상자의 초콜릿을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그는 마지막 상자를 닫고 나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몇 시에 주무셨습니까?"
"한 시요. 그런데 그건 왜……."
"피곤해 보이셔서요. 일어나신 건 몇 시였습니까?"
"네 시에 일어났어요."
우시지마 씨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전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당부하듯 내게 일렀다. 상냥하게 타이르는 것 같기도 했고, 진중한 목소리 사이에 장난기가 묻은 것 같기도 했고, 왠지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신경 쓰며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기는 합니다만, 앞으로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괜찮아요. 원래 생활 패턴도 별로 다를 건 없어서요."
전형적으로 다부진 외모였다. 키가 나보다 한 뼘도 더 큰데다 진한 이목구비를 가졌고, 목소리 역시 낮고 울림이 깊었다. 작은 행동이나 말투에서도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듣는 이런 식의 걱정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걸 걱정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건지도 의문이 들었다. 단순한 잔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가끔가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다음 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때는 세 상자만 준비해 주세요."
"세 상자요?"
"네. 이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걱정은 뭐고 잔소리는 또 뭔지. 우시지마 씨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정신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밤잠 아침잠을 줄여 가며 잉여 생산을 하는 걸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후끈한 기운이 뒷목에서 오르는 것을 애써 모른 체 하며 우시지마 씨를 도와 그의 차에 상자를 넣었다. 우시지마 씨는 창문을 열어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뜰을 빠져나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과한 사람으로 보는 거 아냐? 딱히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름은 진작 지나갔는데도 더웠다. 주방에서 얼음을 꺼내 씹으며 눈을 꾹 감았다.
창피했다.
* * *
12월의 아침은 참 추웠다. 창문을 덜 닫아 바람이라도 새는 날에는 눈을 뜨고 이불에서 벗어나기가 더없이 괴로웠다. 기지개를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욕실로 걸어갔다. 한기에 온 몸이 떨렸다.
익숙하게 상자 안에 직사각형 모양의 초콜릿을 옮겨 담았다. 9월부터 우시지마 씨의 작업을 돕게 된지도 세 달이 다 되어간다. 매주 한 번 만나지만 그동안 딱히 관계가 더 친밀해진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깍듯하게 말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나 역시도 같았다. 그런 점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빼면 그와 나는 꽤 잘 맞았다. 직접 만나서도 연락을 하면서도 일 얘기만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주방에서 손을 닦고 있다가 뒤뜰로 들어오는 우시지마 씨의 차를 보고 준비해둔 상자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어제 오후 여섯 시 쯤 전화가 와서 평소보다 조금 더 준비해 줬으면 한다기에 두 상자가 늘었다. 그러니까 총 다섯 상자였다. 꽤 묵직하기도 했고 한꺼번에 다 가져가기에는 시야가 가려져 총 세 번에 걸쳐 테이블에 상자를 옮겼다. 우시지마 씨는 내가 마지막 한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에 상자를 열어 초콜릿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런 우시지마 씨를 잠깐 보다가, 뒤뜰로 눈을 돌렸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어쩐지 조금 나른해졌다. 심은 기억이 없는 코스모스를 세는 것이 지겨워 얼른 눈길을 돌렸다. 우시지마 씨는 여전히 초콜릿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봐서는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의 변화였지만 조금 더 인상이 깔끔해졌다. 이 사람을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손톱도 항상 짧게 다듬어져 있었고 턱 주변이 지저분한 모습도 본 기억이 없다. 작업실도 깔끔하겠지. 갑자기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우시지마 씨는 내가 녹이고 굳힌 초콜릿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의식의 흐름에는 어떠한 경계도 없었다.
"저, 우시지마 씨."
"네."
"작업실을 구경하고 싶은데……."
"……."
"…역시 실례일까요?"
잠시 말이 없는 우시지마 씨를 보고 역시 무례한 행동을 했나 싶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실례를 했다는 생각과 함께 후끈한 기운이 뒷목에서 솟아올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짧은 생각을 하는데, 우시지마 씨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표정을 보고 잠깐 당황했다. 지난 세 달 동안 이 사람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도 그 앞에서 즐거움을 표출한 적은 없었지만, 우시지마 씨는 형식적인 미소도 한 번 없던 사람이었다. 우시지마 씨의 미소를 보고 당황스러웠던 건, 내가 그의 그런 표정을 처음 봤던 탓도 있었지만, 살짝 접히며 밑을 향해 내려가는 눈매와 희미하게 움직인 입 꼬리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음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업실이 조금…… 더러워서요."
"……."
"치워 놓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제가 실례를 했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꼭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라부 씨 덕분에 탄생한 작품들이니까,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뒤뜰에 핀 코스모스는 스물 세 송이가 넘는다. 우시지마 씨는 머리를 잘랐고, 나는 조만간 그의 작업실에 갈 기회가 생겼다. 우시지마 씨는 세 상자를 들고 걸었고 나는 두 상자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우시지마 씨가 한 손으로 상자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나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 상자 둘을 내려놓았다.
연한 갈색의 상자에는 오늘 새벽에 내가 흘린 작은 하품이 담겨 있다. 우시지마 씨는 나에게 인사를 한 후 차를 몰아 사라졌다. 어쩌면 그도 저 초콜릿을 꺼내면서 하품을 할지도 몰랐다. 한숨이 서로 섞여든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을바람이 선선했다.
* * *
월요일 아침. 나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우시지마 씨의 작업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런 쪽에는 전혀 문외한이었으나 멋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작업실을 보여 준다고 한 우시지마 씨에게 줄 감사의 초콜릿도 만들었다. 나는 포장한 작은 플라스틱 용기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우시지마 씨가 작업할 때 쓸 초콜릿의 상태를 확인했다. 말도 안 되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단 것 같았다. 그 전날 중탕할 때 쓰는 볼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설탕이 조금 더 들어갔나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뒤뜰에서 짧게 경적소리가 들렸다. 차가 들어오는 걸 왜 못 봤을까. 겉옷을 입고 상자를 들었다. 차에서 내린 우시지마 씨가 얼른 두 상자를 가져가며 인사를 했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우시지마 씨가 슬쩍 웃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그가 웃는 모습을 알아채지 못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은 덜 피곤해 보입니다."
"똑같은데요. 우시지마 씨야말로 목소리가 조금 더 밝네요."
"저도 똑같습니다."
의미 없는 짧은 대화를 한 후 상자를 차에 실었다. 그리고 다시 주방으로 가서 준비한 초콜릿을 꺼냈다. 단 걸 싫어할까 봐 적당하게 만든 초콜릿이 걸을 때마다 소리를 냈다. 나는 조수석에 타서 안전띠를 매고 나서야 아직 이 사람과 꽤 어색한 사이라는 걸 깨달았다. 차에 그 흔한 CD도 한 장 없었다. 라디오를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40분을 꼬박 이렇게 정적 속에서 있어야 한다니 벌써부터 답답했다.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중학생 이후로 하지 않은 행동이었는데. 창밖의 풍경이 시야 뒤로 빠르게 넘어갔다. 우시지마 씨는 역시 한 마디도 대화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런 식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 늘 이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는 더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시라부 씨는 말이 없어서 둘만 있으면 어색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그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저, 우시지마 씨."
"네. 시라부 씨."
"……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의 바른 말투. 예술가는 자유분방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우시지마 씨는 격식이 몸에 베인 사람처럼 보였다.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눈을 마주치는 것은 우시지마 씨가 생각하는 예의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우시지마 씨는 아마 내가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것이다.
"우시지마 씨는 저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렇게 깍듯하게 말하는 거요."
우시지마 씨는 아무 말도 없이 운전만 계속 했다. 기분 나쁘게 했나? 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침착하기 위해 숨을 천천히 쉬었다. 차가 신호에 걸리자 우시지마 씨는 앞을 보고 말했다.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셨습니까."
"네? 아뇨. 불편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좀……."
"……."
"나이 차이가 엄청 나지는 않지만 나이대가 다르기도 하고…… 제가 오히려 실례되는 기분이어서요."
우시지마 씨는 내 말을 듣고 잠깐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운전을 계속 했다. 대답을 어떻게 할지 속으로 많이 생각해 본 다음 말하는 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말이 적었나. 말이 적으니 실수가 적고. 아까 급하게 만든 변명 같은 내 대답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이때까지 나름대로 스스로가 논리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뭐에 당황해서 그렇게 긴장하며 대답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무의식은 이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었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네?"
"당장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지만 저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
우시지마 씨는 핸들을 돌리며 내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 정말 어려운 사람이다. 키우기 까다로운 난초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내 의견을 존중해 준 것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며 앞을 보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출근 시간을 넘긴 도로는 한산하기만 했다. 나는 주머니 안에서 초콜릿을 담은 용기를 만지작거리며, 우시지마 씨가 의외로 단 걸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보라색 팻말 붙은 집이요?"
"시력 좋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창밖을 보며 한 내 대꾸에 우시지마 씨가 작게 웃은 것 같았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다시 뒤를 돌아 그의 표정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천장에 난 큰 유리창이 눈에 띄는 그의 집이 가까워졌다. 작업실은 집 뒤편에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상자를 들고 그를 따라갔다. 우시지마 씨의 집은 잔디 위에 있었는데, 새벽 쯤 짧은 비가 와서 땅이 조금 젖었다.
"작업실로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도 괜찮으면요."
"이 쪽입니다."
우시지마 씨는 현관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나는 상자를 들고 주머니의 초콜릿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그를 따라 걸었다. 정면으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집이 세로로 조금 긴 편이었다. 우시지마 씨는 집보다 조금 작지만 그래도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큰 곳으로 들어갔다. 우시지마 씨가 벽면을 더듬어 불을 켰다. 조명이 한 번에 켜지고, 나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내부와 수많은 작품에 놀랐다. 이런 곳은 정말 처음이었다. 우시지마 씨가 조명을 조절했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인테리어 조명을 보고 있자니 미술관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대단하네요."
"아닙니다. 저…… 편하게 구경하세요. 차를 좀 가져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작업실은 넓기도 했지만 천장이 높았다. 흰 페인트가 벽에 잘 발려 있었고 천장에는 움직일 수 있는 조명이 달려 있었다. 다양한 크기의 이젤, 엄청난 양의 종이와 가죽, 스프레이, 물감, 페인트, 붓, 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감이 묻은 여러 도구들은 한 쪽 편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초콜릿 향이 났는데, 아마 지금 계획 중인 프로젝트인 것 같았다. 봐도 될지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돌아섰다. 대신 벽에 걸린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언어로 쓰인 이름이 있었다. 듣기로는 그래피티의 가장 기본 중 하나인 태깅(tagging) 같았다. 단순히 이름만 쓴 것 같으면서도 엄청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아무런 도안 없이 어떻게 스프레이로 이런 모양을 그려내는지 신기했다.
“춥지 않으십니까? 추위를 잘 타지 않아서 작업실에는 난방기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차 드세요.”
“감사합니다. 프랑스어네요, 이거.”
프랑스어로 쓰인 그의 이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회사의 브랜드 로고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스프레이가 뿌려진 감각적인 디자인이었다.
"…… 프랑스어, 할 줄 아십니까."
"벨기에에서 잠깐 공부했었어요.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고."
"…… 그렇군요. 저는 프랑스어는 잘 모릅니다. 이건 국제 연합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전시되었던 작품인데, 문화의 다양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각국의 언어로 구성된 그래피티를 여러 국적의 작가들이 제작했었습니다."
"어쩌다가 프랑스어를 맡게 되셨어요?"
우시지마 씨가 머그컵을 매만졌다.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지만, 대화를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길 자신은 없었다. 나는 평생 이 사람과 어색하게 지낼 사이인가. 목을 가다듬었다가 컵 안에 있는 찻잎이 이리저리 허우적대는 모양을 보고만 있었다. 우시지마 씨가 작업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잠깐 거기에 가만히 있다가, 그가 나를 힐끗 돌아보고 나서야 발을 움직였다. 초콜릿 향이 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기자의 질문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네?"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동료 작가들이 저를 놀리고 싶었는지 이참에 프랑스어 좀 배우라며 등을 떠밀더군요. 억지로 맡았습니다."
"…… 저 웃어도 돼요?"
우시지마 씨가 나를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말 그대로 '터뜨렸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쓰지 않고 소중히 넣어둔 즐거운 감정을, 내킬 때마다 하나씩 쏟아지게 만드는 것. 경계 없는 그의 웃음에 나까지 덩달아 웃음이 나서 그와 나는 걸음을 잠깐 멈춰야 했다. 별 것 아닌 이유라도 같이 웃는 사람이 있다면 유쾌해지는 순간이 있다. 우시지마 씨는 여전히 올라간 입 꼬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 쪽입니다. 시라부 씨가 주신 초콜릿으로 만든 작품들."
"아까 보려고 했는데, 왠지 실례일 것 같아서 안 봤어요."
"보셔도 되는데. …… 아."
우시지마 씨가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살짝 눌렀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급하게 초콜릿 그래피티 쪽으로 뛰어갔다가 다시 나온 우시지마 씨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망설이는 표정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왜 그러세요?"
"생각해 보니까 이 쪽은 청소를 덜 한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아까 대충 봤을 땐 그렇게 더러운 것 같지도 않았는데요."
"아니, 다음에요. 다음에 다시 오시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시지마 씨가 내 앞을 가렸다. 말하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이렇게까지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데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기회는 많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우시지마 씨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듬성듬성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깐 내리고 마는 비라고 했는데. 모자를 뒤집어쓰고 달리면 버스 정류장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초콜릿을 꺼내 우시지마 씨에게 내밀었다.
"이게……."
"작업실 구경시켜 주신 거에 대한 감사 표시요. 혹시 단 거 좋아하세요?"
"네. …… 좋아합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달게 만들어 올게요. 어떤 취향이신지 잘 몰라서 그렇게 달지는 않게 했거든요."
"안 단 것도 좋아합니다."
"…… 다행이네요."
우시지마 씨가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나는 모자를 쓰고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비가 아까보다 조금 더 내렸다. 여차하면 심하게 젖을 수도 있겠다 싶어 모자를 조금 더 끌어내렸다.
"안녕히 계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실 겁니까?"
"구경 다 했으니까요."
우시지마 씨가 잠깐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말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우시지마 씨가 손을 뻗어 내 모자를 도로 벗기고는 말했다.
"식사…… 하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밥이요?"
"네. 아침 겸 점심이요."
"……해 주실 거예요?"
"손님에게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우시지마 씨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내부는 따뜻했다. 나는 목도리를 벗어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우시지마 씨는 나에게 실내화를 내어주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 주방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반쯤 가려진 채로 익숙하게 앞치마를 매는 우시지마 씨가 보였다. 나는 최근 며칠 우시지마 씨의 새로운 모습을 정말 많이 발견했는데, 어쩐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렇게 생활했고, 나는 그의 어릴 적 친구였다가 최근에 다시 만난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시지마 씨!"
"네?"
"혹시 도울 거 있으면 말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혼자 산지 오래 되어서 먹을 만하게 합니다.“
자취생들 단골 멘트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웃었다. 그리고 잠깐 소파에 기대 있다가, 그만 얕은 잠에 들었다. 조금 이따가 우시지마 씨가 나를 깨우러 왔을 때, 나는 또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을 그에게 말해야 했다. 취침시간은 30분 빠르게, 기상 시간은 30분 늦게 말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시지마 씨는 요리를 잘 했다. 혼자 산다고 다 요리를 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5년째 자취 중인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 되었다는 말에 식탁에 다가간 내 눈에 보인 것은 친구가 해 먹던 형편없는 퓨전 요리 같은 게 절대 아니었다. 손이 많이 갔다는 게 눈에 보이는 파스타와 샐러드는 정말 방금 내가 자는 동안 혼자 준비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알리오 올리오예요?"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마침 재료도 있었고……."
"저 이것만 먹어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식사했다. 그는 나에게 종종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목이 마르지는 않은지, 샐러드 접시가 너무 멀지 않은지를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매주 월요일마다 그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요일 저녁에 내가 잠깐 나가 월요일의 식사 재료를 사오게 될 것이라는 것 또한 그랬다.
나는 우리가 매주 월요일이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점점 마음에 담게 되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것 하나 완전한 게 없었다.
그는 더이상 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내 농담에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에게 사무적인 말투로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에게 반말을 하며, ‘시라부’ 라고 불렀다. 내가 농담을 하면 재미있다는 얼굴로 재미없다고 말했다. 상냥한 목소리로 나의 하루를 궁금해 했다. 가끔은 혼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잡기도 했다.
나는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대로 흐지부지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우시지마 씨와 내가 같은 마음을 확인했으면 했지만, 사실은 그저 결판을 내고 싶었다.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맞기를 바라는 간단하고 뻔한 상황이었다.
* * *
발렌타인데이였다. 우시지마 씨가 이런 날을 챙기기는 할까. 나는 우시지마 씨의 영문도 모르는 표정을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꽤 깊이 고민했다. 초콜릿을 만들면서도, 상자에 리본을 둘러 포장을 하면서도, 우시지마 씨의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그 걱정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때 줄 생각이었는데, 점심을 늦게 먹은 탓인지 우시지마 씨는 저녁 얘기가 없었다. 나 역시 저녁을 먹을 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 무릎을 베고 얼굴에 책을 올린 채 우시지마 씨는 꽤 오래 말이 없었다. 잠이라도 들면 큰일이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우시지마 씨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시지마 씨. 주무세요?"
"아니."
"오늘 발렌타인데이인 거 아세요?"
"……."
우시지마 씨가 얼굴 위에 덮은 책을 내려놓았다. 반쯤 들어 올린 눈꺼풀 밑으로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당황한 것 같았다.
"뭐, 모를 수도 있죠. 저도 세계 그래피티의 날 같은 건 언제인지 몰라요.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에요."
"알고 있어."
"그래서 우시지마 씨 드리려고 초콜릿을 만들었어요."
"……."
"받아 주실 거예요?"
우시지마 씨가 책을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이 없는 우시지마 씨의 등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빛이 우시지마 씨의 머리칼 위로 부서졌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래."
"……."
"받을 거야.”
우시지마 씨를 향한 자세 그대로에서 손을 뻗었다. 책장을 더듬어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황금색 리본이 둘러져 있는 짙은 청록색의 상자였다. 우시지마 씨는 내가 내미는 상자를 들고 한 손을 뻗어 소파 밑을 더듬었다. 그의 손이 작은 상자를 쥐고 다시 나왔다. 우시지마 씨는 두 상자를 번갈아보더니 이내 망설이듯 내게 자신이 꺼낸 상자를 내밀었다. 연한 갈색릐 상자가 보라색 리본으로 감싸져 있었다. 상자 겉에는 그의 반듯한 글씨로 '시라부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손으로 글자를 건드리자 약간 마른 유화 물감이 만져졌다.
"그건 내가 만들었어. 네 초콜릿에 비하면 볼품없지만…… 받아 주면 좋겠군."
"고맙습니다, 우시지마 씨. 잘 먹을게요."
"나도 네 초콜릿 잘 먹을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생각해 줘서 고마워. 우시지마 씨는 그렇게 말했다. 황금색 리본을 매만지며 나를 쳐다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시지마 씨가 한 말의 모호함에 나는 약간 불만이 생겨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그에게 물었다.
"모르는 척 하시는 거예요?"
"…… 아니."
그러면 뭐예요?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아이처럼 그를 다그치며 조급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시지마 씨는 내가 그렇게 행동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너랑 만나고 싶다. 정식으로."
"……."
나는 우시지마 씨의 목소리가 좋았다. 종이봉투, 얼룩, 오늘은 날이 추우니까, 우주, 현관 앞에 있는 화분, 그렇기는 하지만, 열쇠, 시라부……. 그의 목소리로 나오는 말이라면 뭐든 좋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가 라디오 진행자였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우시지마 씨는 말을 빨리 하는 편이 아니니까 나른한 오후에 하는 책 읽는 방송이 어울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동화를 상상하면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의 목소리로 듣는 시를 상상하면 마음 속에 깊고 깊은 깨달음의 울림이 고였다. 나는 우시지마 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 역시 좋았다.
그리고 우시지마 씨의 입에서 나와 같은 마음이 나오기를 바랐다. 시라부, 네가 좋다.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너와 더 많은 시간을 약속하고 싶어. 우시지마 씨는 한동안 꿈에서 내 바람을 이루어 주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죄송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꿈을 멈출 수 있는 건 현실뿐이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이건 절대 꿈이 아니었다.
"… 좋아요."
발렌테인데이에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괜히 있는 소리가 아닌지도 모른다. 지금 나를 안아오는 다정한 품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 내 귓바퀴 근처에 잠깐 다녀가는 입술,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눈. 그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연인의 등을 끌어안으며 창을 올려본다. 별은 당연하게 거기에 있었다.
활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마음속에 그가 또 떠오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우시지마 씨에게 다가갔다. 두근거리는 내 시선을 따라 빛도 함께 걸었다.
* * *
프랑스 파리. 에펠탑이 보이는 호텔 10층의 첫 번째 방. 햇빛이 나른하게 빙글거렸다. 우시지마 씨는 곧 있을 전시회에서 입을 정장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 작은 거 아니에요? 나는 소파에 누워 마카롱을 집으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과학교에 다닐 때 꽤 열심히 배웠던 마카롱을 메뉴에 넣어 볼까 잠깐 고민했다. 나는 부모님의 가게에서 나와 독립할 생각이었고, 오랜 계획을 방금 우시지마 씨에게 설명한 참이었다.
"가게 이름은 정했어?"
"네. 프랑스어로 지었어요. aube blanc."
"하얀…… 모르겠어."
"하얀 새벽이에요. 그래도 이제 아예 모르는 건 아니네요."
우시지마 씨는 내가 선물한 프랑스어 책을 들어 보였다. '쉽게 배우는 프랑스어 초급편. 당신도 할 수 있다!' 상투적인 문구 밑에 까맣게 적힌 그의 이름이 큼지막했다. 우시지마 씨는 새벽 같은 단어는 아직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유를 조금 더 따라 마셨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내다 봤더니 접촉사고인 모양이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옆방의 할머니가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접촉 사고인가 봐요.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이군. 시라부, 이제 가게를 어디에 차릴 건지 얘기해 주면 좋겠다."
"생각 중이에요. 집이랑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멀어도 안 되니까."
"우리 집 근처로 하면 되겠네."
책을 넘기며 약간 웃었더니 우시지마 씨가 왜 웃느냐고 물어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나는 스크랩할 부분의 쪽수를 메모지에 적어 놓고 책을 덮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바싹 다가온 우시지마 씨의 얼굴이었다. 왜요. 우시지마 씨가 내 입 꼬리 근처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멀어졌다.
"너희 집에서 차로 40분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세요?"
"너한테 하는 말은 항상 진심이야."
고려해 볼게요.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었는지 우시지마 씨는 여전히 불만 섞인 표정으로 볼펜 뚜껑을 열었다. 오후 두 시. 늦은 점심을 함께 먹었고, 난방기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우시지마 씨의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리다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아주 짙은 청록색의 저 머리칼을 볼 때면, 가끔 엄청난 깊이의 폭포가 떠오르고는 한다. 가만히 서 있으면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온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웅장한 폭포가.
"시라부. 정말 혼자 올 수 있겠어?"
"네. 저 우시지마 씨보다 프랑스어 훨씬 잘 하는데요."
어느새 정장을 입은 우시지마 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금 정리해 주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하고는 손가락으로 내 코 끝을 톡톡 두드렸다. 조금 이따가 봐.
"우시지마 작가님, 길 잃으면 안 돼요."
"그래. 걱정하지 마."
우시지마 씨의 네 번째 파리 개인전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려고 몰려들 것이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양치를 하고 나서도 마카롱의 단맛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 *
우시지마 씨, 어디 계세요? 침묵. 우시지마 씨? 여전히 침묵. 전화가 끊겼나 확인했지만 통화 시간은 멀쩡히 초단위로 늘어나고 있었다. 혹시 길을 잃었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관계자에게 우시지마 씨의 위치를 물으려다 바빠 보이는 발걸음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휴대전화를 다시 귀에 갖다대자말자 우시지마 씨의 조금 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어 보니 뛰는 것 같았다. 우시지마 씨? 다시 한 번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이 숨소리와 주변의 소음만 들쑥날쑥 들렸다. 어깨와 볼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우고 한 쪽 벽면에 있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래피티의 색과 소리. 전시회의 이름 밑에 조금 얇은 글씨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개인전. 우시지마 씨의 이름을 볼 때면 언제나 자랑스러웠고, 존경스러웠고, 본받고 싶었다. 벽에 걸린 포스터에 눈이 갔다. 편한 옷을 입고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이 작게 담겨 있고, 전시회의 정보들이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 테니스 채를 들고 커다란 물방울을 치는 그의 모습은 뒷모습이었지만, 나는 저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있다. 누구보다 해사한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라부? 휴대전화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퍼뜩 전화기를 고쳐들었다.
"네, 우시지마 씨. 어디세요?"
"화장실 앞. 너는… 아, 저기 있다. 시라부!"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주변을 휙 둘러보는데 뒤에서 익숙한 향이 훅 끼쳤다. 뒤를 돌았다. 우시지마 씨가 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아, 상냥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정말 좋았다. 우시지마 씨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간지러운 감촉이 생생했다. 딱히 차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내 손이 그의 손을 너무 따뜻하게 느꼈다.
"시라부, 추워 보인다. 볼이 빨개."
"안은 따뜻한데요. 괜찮아요."
우시지마 씨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말 괜찮다고,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조금 있으면 오히려 더워질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 내 성격에 귀찮을 법도 한데 이상했다. 추운 게 싫다고 말하는 내 손을 쓰다듬으며 자신은 추위를 잘 타지 않아 내 기분을 못 알아채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자주 물을 수도 있다고 내게 양해를 구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제한되어 있었다. 얼굴에 표정이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얼굴은 초조해하는 표정이다.
"이제 가 보셔야죠."
"너무 앞에 서면 위험하니까 조심해. 사람이 많아서 부딪힐 수도 있어."
"알아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오후 다섯 시, 프랑스의 어느 갤러리. 개성 있는 동양의 그래피티 작가와 그의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 내가 아는 언어와 그렇지 못한 언어가 한데 뒤섞여 있다. 그런데도 전혀 어지럽지 않았다. 우시지마 씨의 작업실에서, 구체적인 모양과 완벽한 형태를 가진 선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얇아지다가 결국 사라지는 작품을 본 기억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속삭임도 마음이 변하면 이명일 뿐. 그런 해설이 달린 작품이기도 했다. 우시지마 씨의 이명조차도 나의 속삭임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저 사람이 의미 불명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면 이 먼 나라까지 오지도 못했다.
어느새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는 우시지마 씨를 발견한다.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할 때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우시지마 씨는 말을 잘 했다. 당연한 거였지만. 저 사람이 못 하는 일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긴장하는 기색 없이 작품을 설명하던 그는 물을 마시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닐 때 우시지마 씨가 속해 있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기분은 생각보다 더 미묘했다.
스무 점 가까이 설명을 하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일정하게 말할 수 있지. 우시지마 씨에게 감탄하며 다음 작품이 있는 곳으로 조금 걸음을 옮겼다. 그 작품은 천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며 그림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온갖 언어가 섞여 들렸는데, 영어와 프랑스어는 각각 이게 제일 궁금했어, 안내 책자에서도 아무 설명 없던데, 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입니다."
우시지마 씨가 천을 걷어냈다. 어두운 갈색으로 칠해진 그림이 눈에 보였다. 작게 환호성이 들렸다. 초콜릿이었다. 내가 녹인 초콜릿으로 그려진 나의 모습이었다. 그 작품은 나에게 주는 우시지마 씨의 선물이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쁘다든가 고맙다든가. 그런 표정을 지었어야 했는데. 그에게 보였어야 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이 담겨 있는 커다란 종이를 보고 잠깐 멍하게만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걸어가서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아주 작은 글씨들이 모여 큰 형태를 이루는 표현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었다. 나를 이룬 글씨가 무엇인지 보려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름일까 했는데 영어였다. 글씨 위에 글씨. 그 글씨 위에 또 글씨. 수없이 겹쳐져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자리에 겨우 알아볼 만한 형체가 있었다. 나는 작은 글씨를 느리게 훑었다.
'my muse'
예술가의 뮤즈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영원을 믿게 될 것 같잖아. 언젠가 본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기도 했다. 누군가의 영감이 되고, 그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동시에 내 뮤즈가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도 늘 궁금했다. 우시지마 씨에게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전혀 없었다. 액자 옆에 그의 자필로 쓰인 작품명이 그제야 보였다.
[하얀 새벽을 여는 사람, 우시지마 와카토시 作]
고개를 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눈이었다.
안녕하세요. 월간 우시시라 2월호에 참여할 수 있어서 기쁜 밸런타인데이입니다! 조사를 많이 하지 않고 쓴 글인데다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여러 부분을 삭제해 버려 전개가 엉뚱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항상 우시시라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올바른 외국어 표기법은 밸런타인데이가 맞지만 읽기에 어색하실 것 같아 발렌타인데이를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