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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ph-

​갑돌

  흠모하는 사람과 우연히 살결이 맞닿는 것에 대하여. 작은 파동에 감정의 안팎이 가물어지고 시야가 허물어지며 상승하는 온도에 온몸의 말단이 달아오르는 증상. 귀가 멀어버린 듯 귓바퀴를 맴도는 심장 소리만이 들려오는 현상의 단초.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공식이 뒤틀리고 비틀리는 거센 파도. 폭발하는 감성과 그것을 내리누르는 이성의 대립. 그 위로 형성되는 열병의 둥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만 볼 수 있었던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았다. ‘잡았다’라는 완고하고 단정적 표현보다 내 손을 스쳐지나갔다. 쥐고 있던 연필을 조심스레 가져간 후, 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엄지로 지탱하고서 검은 선이 마구 그어진 흰 종이 위로 가볍게 움직였다. 마무리가 온건하지 못한 선들의 이탈을 흑연의 검은 끝으로 다정히 가다듬는다. 눈을 돌린 곳에서 마주한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함을 담고 있었다. 뜨거워진 얼굴을 반대로 돌려 식힌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손이 떠났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결을 따라 파상의 흔적이 남는 것처럼 손이 지나간 곳에는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다.

 

 

 

*

 

 

 

  언젠가, 그 처음, 시작,

  미술보다는, 체육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었다. 1학년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존에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해 올해 봄부터는 새로운 미술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희끗한 흰머리가 드문드문 자리했던 이전의 교사보다 훨씬 더 젊고 건강한 분위기였다. 기대로 술렁이던 교실은 그의 등장 하나만으로 압도되었고, 교실을 둘러보는 색소 짙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나는 펜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전신의 말단까지 뻗는 전율로 인하여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낯선 시선으로 교실을 한 바퀴 빙 훑었다. 그런 뒤에 핏줄이 불거져 나온 다부진 손으로 묵묵하게 칠판에 제 이름을 써 내려갔다.

  그가 이름을 희게 적어가는 동안 너른 등을 감싼 흰 셔츠는 팽팽하게 당겨져 굵직한 뼈대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백색 분필을 내려놓는 그를 보며 찰나의 순간에 몇 번을 되뇌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야만 했으나, 나의 생각은 듣는 이가 없는 고요한 아우성이었으니 마음대로 칭해도 될 터였다. 그에게 체육이 더 잘 어울릴 거라는 나의 생각은 이름을 다 쓴 후에도 긴장을 풀지 않는 그의 모습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가슴께 근육의 윤곽이라던가 하는, 체격과 더불어 강하고 거센 외모적인 면에서 파생된 일종의 편견이었다. 또한 몸의 마디마디에 근육을 두른 눈앞의 남성은 예술과 거리가 멀 것이라는 나의 아주 편협한 틀에서 비롯된 하찮은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된 그는 누구보다 예술에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심미적인 애정에 때와 시를 정의할 수 없이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자각하게 된 마음은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것이었다.

 

 

 

 

  월요일,

  곧은 허리가 둥그렇게 휘어지고 척추에 기대 팽팽하게 당겨지는 흰 셔츠가 보인다. 허리를 가늘게 두른 앞치마의 끈은 등 뒤에서 여전히 끝이 딱 맞아떨어지는 리본이다. 마디가 굵은 손이 교탁 아래에서 제 몸의 단면의 지름과 비슷한 길이의 판을 꺼낸다. 90도로 각진 끝을 잡고 반바퀴 돌린다. 고작 몇 초 전의 세로는 가로가 되고, 가로는 세로가 된다. 등을 보인 흰 면 너머로 오늘의 그가 알려줄 작품이 있을 터였다. 조금 덥겠지만 몇 분 동안 환기를 시키자는 그의 말을 따라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7월의 후덥한 바람이 뭉근하게 불어온다.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종이를 뒤집는 손은 들떠있다. 단정한 손을 바라본다. 지난 시간에 스쳤던 그 온기를 떠올려본다. 갈비뼈 안쪽의 공간으로부터 보드라운 바람이 꽃잎과 함께 휘돌듯,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림의 제목. 아는 사람?"

 

 

  수채화보다는 묵직한 유화에 가깝고, 사실 유화라기보다는 더 깊이 있게 그려진 수묵화에 가까운 목소리가 대답을 원하는 의문문을 내뱉는다. 그의 목소리는 파묵과 발묵의 사이를 자유롭게 담금질하며, 짙은 농담濃淡과 거친 붓의 억양으로 그려져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원추형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붓 끝이 낮은 톤의 목소리를 흠뻑 머금고 부서져 내리는 폭포를 그리듯 진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그가 그려놓은 물음표에 대한 답이 던져졌다. 목소리는 옅은 색의 느낌표를 띄운다. 진중한 구석이 있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웃음이 덧그려졌다. 시야가 채색되듯 환하게 밝아진다. 그가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자 적당한 색으로 그을린 팔뚝이 드러난다. 굵고 다부진 그 완벽한 몸선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그와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서 막연히 바라보기만 하는 입술이 열린다. 종이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동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해 설명한다. 평소보다 조금 상기된 목소리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그의 들떠있음은 언제나 나의 낡고 오래된 생각을 뛰어넘었다. 곧은 콧날 아래에 위치한 입술은 가늘게 늘어지기도 하고 동그랗게 모이기도 했다. 그를 눈에 담으며 잠시 그에게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한다.

 

 

  "산치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그림을 들고서 교실의 끝과 끝을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며 그림의 제목과 산치오 라파엘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테르 브뤼헐을 설명하던 저번 시간 보다 더 상기된 목소리로 라파엘의 천재성을 읊는다. 가르친다기보다는 단순히 읊는다는 느낌이 강한 어투에 거부감이 들었던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지나버린 옛일로 남아있다. 그가 첫 모습을 드러낸 뒤 그의 말투에 관해 여러 종류의 말들이 오갔었고 그 소란들은 곧 '아무렴 어떤가'라는 의견으로 굳혀졌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충만함이 가득한 눈으로 라파엘의 르네상스, 고전주의, 작품의 정밀精密과 완결함을 내뱉는다. 산치오 라파엘로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더 읽어보지 않았던 과거를 잠시 동안 후회한다. 오늘은 산치오 라파엘로에 대해 파고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얇은 펜촉으로 아담과 이브, 화가의 이름을 적고 밑줄을 친다. 언젠가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할 날이 온다면 분명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며, 나는 대화 이후에 그에게 만족스럽다는 눈빛을 받고 싶었기에 지적인 부족함을 원하지 않았다. 글자를 중심으로 납작한 동그라미를 그린다. 조금 찌그러진 선 위를 굵게 덧칠한 뒤 다시 고개를 든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친다. 나는 열기가 몰리는 귓가를 느낀다. 참을 수 없는 뜨거움에 그의 깊은 충만함에서 평면에 담긴 아담과 이브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어느 종교의 신자도 아니며, 아담과 이브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잘 알지 못했다. 오직 아담과 이브 혹은 하와. 그들의 이름과 선악과와 에덴동산 같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단어 토막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들고 있는 사진 속 이브가 가진 여성의 신체는 곧 남성의 밋밋한 가슴으로 변모한다. 아담과 이브의 얼굴이 흐려지고 그곳에는 나와 그의 얼굴이 덧입혀진다. 나체의 그를 생각하니 이번에는 얼굴이 달아오른다. 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받아 적는 척 낙서를 했다. 아담과 이브, 라파엘, 유화, 프레스코화, 그가 내뱉는 문장을 동강내고 나누어진 조각들을 끄적인다. 아담과 이브라는 단어를 일본어로 한 번, 괜히 멋쩍은 마음에 영어로 한 번을 더 적어내린다. 그리고 시라부 켄지로와 그 옆의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이름을 적는 순간 고막 가까이에서 심장의 소란이 들리며 핑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나의 조막만 한 욕망을 볼 수 있을 거 라는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펜 끝을 둥글게 움직여 검은 선으로 그의 이름을 덮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그의 여덟 글자 이름을 검게 지워가는 동안 어느 한구석이 끓었다. 심장 소리는 여전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을 전부 칠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드는 앞치마가 느린 걸음을 따라 움직인다. 그가 그린 그림인지, 앞치마 귀퉁이에 종류를 알 수 없는 붉은 꽃과 박쥐의 모습을 단순화 시킨 형상이 자그맣게 자리해있다. 나는 검지손가락만한 그림을 보며 그가 다부진 손으로 꽃을 그리고 박쥐를 그려 넣는 상상을 하고서 언제나 작게 웃었다. 교실에서 행해지는 수업은 굳이 앞치마를 입고 올 필요는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수업 언제나 앞치마를 입고 수업을 했다. 일종의 시그니처인 셈이었다. 말라붙은 색의 덩어리들은 종종 다른 위치에 자리했다. 그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날이면 10분에서 5분 정도 일찍 마치고 오늘 수업에 대한 감상을 적게 만들었다. 성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던지 또는 아직은 어렵다던지, 어떤 그림을 가져왔으면 좋겠다던지 등등 그는 무엇이든 솔직하게 표현하기를 바랐다. 나는 흰 종이 위에 검은색 펜을 쥐고 어떤 문장의 운을 먼저 띄워야할지 고민한다. 언제나 정성껏, 그러나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을 적어내려갔다.

 

 

  옆자리에 앉은 동급생의 페이지를 흘긋 바라본다. 단 세 줄. 짧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분량이었다. 교실의 앞에서 서성이던 그가 어느새 색이 짙은 눈으로 책상들을 바라보며 나를 지나쳐 간다. 코 끝 언저리에 짧게 머물렀던 향기가 스쳐간 궤적을 따라 괜히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내 몸짓이 저를 부르는 줄로 알았는지 막 내디디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온다. 책상 위를 훑는 눈이 다정했다. 도와줄 거라도? 그의 눈빛이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모를 테지. 내뱉었던 고작 몇 음절 단어에 어떤 떨림이 담겨있는지. 괜찮아요, 저는 그저 이 한품의 다정한 관심만 있으면 돼요. 뱉을 수 없는 문장은 속으로 삭힌다. 또 다시 열이 오르는 귀를 그가 보지 못하게 가리며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화요일,

  도서관에서 르네상스에 관련된 책을 비롯해 산치오 라파엘로가 있을 법한 책들을 골라 탑을 쌓아놓는다. 두꺼운 커버를 열어젖히고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를 넘겼다. 인덱스가 적힌 페이지로 이동해 산치오 라파엘로 혹은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찾아 넘겨가며 읽는다. 경의에 찬 활자들로 가득한 페이지를 눈에 담는다. 시스티나 마돈나, 성명의 밤, 아테네 학원, 대공의 마돈나, 성체의 논의, 갈라테아의 승리.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찬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읊었던 정밀과 완결함을 떠올리며 그의 그림들을 보고, 산치오 라파엘로에 대한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가 어째서 산치오 라파엘로를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야 그와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으로 책을 덮는다.

 

 

 

  수요일,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일상에 찾아온 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언제나 카와니시 타이치와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타이치는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으레 그러했듯 타이치에게 축구를 하러 가도 된다는 말을 했으나 타이치는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기에 시선을 바깥쪽으로 피하며 다음에 해도 괜찮다는 대답을 했다. 만족스러운 답을 이끌어낸 후 타이치보다 몇 발자국을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나는 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뜀박질을 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혼자서 외로워 보이는 것은 싫었기에 이 시간만큼은 이기적이기로 마음먹었다. 내리쬐는 자외선 아래에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열기가 아롱거리는 교정을 걷는 일은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서 교정을 돌아보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이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쪼개지 않으면 1층에 위치한 미술실을 볼 수가 없었으며, 미술실 안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볼 시간이 줄어든다는 까닭이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언제나 미술실의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 안에서 저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덥지도 않은지 창틀 너머로 부서지는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거나, 그 빛을 피해 그림을 그리며 그 혼자의 공간에 빠져들어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마 그가 이 학교를 떠나는 순간까지 혼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세계에 생각지도 못했던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양호실의 그 사람이었다.

 

  미성숙한 마음은 그 속이 좁았다. 가장 새것의 돛을 단 배가 항구에 정박하고, 그 아래로 무거운 닻이 숭덩 내려앉는다. 육중한 무게가 지나간 자리 위로 커다란 파동이 넘실거렸다. 날카롭게 휘어진 갈고리 모양의 닻가지가 심장의 어느 한 군데를 묘지錨地로 정하여 깊게 찔렀다. 갈고리 끝의 톱은 설익은 속내를 다 내보이게 만들 심산인지 마무리가 뾰족한 혀로 물렁한 안쪽을 세차게 비집는다. 울컥 피를 토하는 대신 목구멍 안쪽에서 복잡한 감정이 심장의 움직임을 따라 퍼덕거리는 것을 느낀다. 바닥에 깔려있는 블록 위를 밟던 걸음의 속도를 늦춘다. 발을 멈추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그들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흥미 섞인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상대는 과장스러워 보이는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 몸짓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제 책꽂이를 건드리며 한 권의 책을 꺼네 건넨다. 저곳에 끼어들 수 없다. 밑도 끝도 없이 목탄으로 검은 칠을 하듯 덮어지는 감정이 갈비뼈와 명치를 두드린다. 어깨를 건드리는 타이치의 손에 몸을 퍼뜩이며 옆을 바라보았다. 타이치는 손바닥으로 차광막을 만들어 제 이마에 붙인 채였다.

 

  "뭐 해?"

 

  나는 고개를 가로로 휘저으며 그대로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을 뒤늦게 내놓았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타이치의 팔목을 붙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오후 수업과 부활동은 엉망이었다. 필기도구나 책이 손에 제대로 잡히는 시간은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 끝은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양호실의 그 사람으로 연결되었다. 하루가 망가졌다. 카와니시와 어떻게 집에 갔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와니시가 내게 무엇을 물었던가? 내가 그에 알맞은 대답을 했던가? 이런 고민의 마무리도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얼굴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늘은 잠에 들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에 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스탠드를 켜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는다. 뒤이어 몰려오는 졸음의 끄트머리를 잡기 위해 곧바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목요일,

  알람 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밤새 뒤척이느라 잠에 들지 않았으니 몸을 일으키기는 쉬웠다. 수건과 속옷을 들고 욕실로 향한다. 샤워콕을 돌려 찬물로 온몸을 흠뻑 적신다. 이를 달달 떨어대며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쓰듯 벽에 머리를 두어번 쿵쿵 찧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양호실 선생님의 모습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꽤나 친해보이는 모습이 흰 타일이 조밀하게 붙어진 벽 위로 덧그려진다. 손바닥으로 그 위를 가리며 이마를 가져다댔다. 두통을 가져올 정도의 냉기가 전해졌다. 그래, 우시지마 와카토시 같은 사람에게 사람이 꼬이지 않을리 없지. 당장에 내가 있는 협소한 공간에서만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들 세어보자면 손가락 다섯 개로 부족했다. 정수리에서부터 드러난 목줄기와 어깨를 타고 아래로 쏟아져내리는 찬물 덕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간지럽게 두드리는 물줄기가 오늘따라 퍽 거셌다.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낸 후에 방으로 들어와 침대 옆 옷걸이에 걸어놓은 교복을 입는다. 셔츠 앞섶의 단추를 세로로 패인 구멍에 끼워 넣고 아랫단을 두어 번 훅 내린다. 교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밑단을 밖으로 빼놓는다. 집을 나서기 전 책상 위에 펼쳐진 글자가 빼곡한 면을 다시 읽어내렸다. 닉스, 에레보스, 판타소스, 포베토르와 모르페우스. 신화에 흥미는 없으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적힌 탓이었다. 라파엘의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독서가 어떠한 이유로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려 시라스가 들어간 주먹밥을 골라 계산을 한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계산대 위에 놓인 검지만한 크기의 물건을 눈에 담는다. 포장지에 단순화된 박쥐의 실루엣이 그려진 초콜릿이다.

 

 

  "이것도 같이 계산할게요."

 

 

  생각을 더 이어나갈 겨룰도 없이 반사적으로 집어들어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받아 든다. 포장지를 깐 후에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며 초콜릿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는다. 알알이 씹히는 밥알이 축축한 모래처럼 부스러진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목을 축였다. 배가 어느정도 불러왔다. 주머니에 넣었던 초콜릿을 꺼낸다. 잠깐의 시간이었을 뿐인데 벌써 그 표면이 물렁해졌다. 아무래도 지금 먹어야만 했다. 삐죽하게 솟아 오르고 그 만큼 내려앉기가 반복된 끝자락을 가로로 길게 뜯는다. 코팅된 안쪽으로 녹진하게 흐늘거리는 초콜릿은 포장지에 그려져있던 것 처럼 박쥐 모양의 몰드에 넣어져 만들어져있다. 아랫쪽은 아직 괜찮은지 단단한 굳기로 날개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단내가 훅 피어오르며 울적했던 기분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지루한 1교시가 끝났다. 마땅히 다친 곳이나 아픈 곳은 없었으나 꼭 그래야만 할 것처럼 양호실로 향했다. 닫힌 문까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소독약이나 파스 같은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났다. 문을 열기 전, 두 번의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마른 입술을 괜히 손가락으로 훑고서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특유의 냄새에 후각이 갈고리의 형태로 변해 안쪽의 좁은 공간까지 비죽 휘저놓는 기분이었다. 어떠한 일로 온 것인지를 묻는 시선을 받으며 발목이 아파 파스 붙이러 왔다는 풋내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나의 말을 들으며 몸을 일으켜 익숙한 모양새로 파스를 꺼낸다. 파스를 받아들자 종이가 끼워진 파일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학년, 반, 이름과 사유라고 적힌 종이를 바라본다. 칸에 맞추어 내용을 적으라는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책상을 훑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책상에서 연인과 함께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 몇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아니었다. 그와는 확연히 다른 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상승하는 기분을 느끼며 종이에 2학년 4반, 시라부 켄지로, 파스라는 글자를 꾹 눌러 적었다. 꾸벅 인사를 하며 얕은 허밍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양호실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 2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요일,

  공중에는 어디서부터 흘러오는지 모를, 제초를 막 마친 수풀의 푸르고 쌉쌀한 냄새가 한창이다. 그와 더불어 여름 볕을 타고 맡아지는 특유의 향이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흐르며 서서히 확산된다. 반팔을 입어 드러난 살갗으로 가시 돋친 빛줄기가 내리쬔다. 이마의 능선을 타고 콧잔등까지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스탠드 제일 위층에 주저앉아 공을 차는 개발들을 바라본다. 후덥한 열기와, 목을 옥죄는 습기, 더운 바람과 기관지로 쏟아지는 불순물들로 인하여 목 언저리가 텁텁했다. 운동장의 모래 먼지가 공의 움직임을 따라 뿌옇게 일었다가, 뒤이어 찾아온 발길질에 지리분산하게 흩어진다. 땅을 밟는 헛발질들 사이로 무람없는 괴성과 호성이 터져 나온다. 지치지도 않는지 희고 검은 다각형이 원을 이루는 공을 운동장 각진 끄트머리 너머에서 가져와 발끝으로 또다시 툭 건드린다. 흑백의 공은 폭과 높이가 좁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추락한다. 지루하고 어설픈 발놀림들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거둔다.

 

 

  "시라부, 축구 안 해?"

 

  시마다 유키오島田 行男였던가. 양호실에서 파스를 뿌리고 온 건지, 특유의 알싸한 냄새를 풍기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양호실의 그 사람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펼쳤다. 이제는 상관이 없으니 아무렴 좋았다.

 

 

  "몸이 안 좋아서."

 

 

  내 대답에 시마다는 나를 훑더니 몸 관리를 잘 하라는 진정 없는 말을 내뱉으며 개발들의 무리 안으로 섞여들어갔다. 또다시 가물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른다. 마찰은 가하지 않는다.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바로 하려 고개를 두어 번 가로로 휘젓는다. 고작 몇 초의 제정신일 줄을 알면서 그 행동을 두어번 더 반복했다. 지난 며칠 동안 밤을 새워 산치오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에 관련된 서적을 읽느라 밤을 새운 탓이었다.

 

 

  시간이라는 빗금을 따라 드문드문 접혀가던 온몸의 감각이 직선으로 곤두선 것은 호루라기의 비명이 고막을 울린 때였다. 번쩍 치켜올린 머리가 공중을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잠에 들뻔했다. 감긴 눈을 뜨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머리를 바로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와 그 아래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부산스럽던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공을 차던 발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날카로운 소리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 또한 느릿한 속도로 형성되어가는 군집을 향한다. 운동장으로 내려와 맡게 된 여름의 향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비렸다. 허우적거리며 땅을 밟는 시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뭉툭하게 굽어진 신경과 감각들에 혀를 씹고 손톱 가장 안쪽을 눌러 고통으로 구부러지는 감각을 일깨운다.

 

 

  옆에 선 동급생으로부터 가쁜 호흡소리와 퀴퀴한 땀 냄새가 울렁인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그 반대쪽으로 향하여 사선으로 떨어트렸다. 운동장을 가득 채운 흙모래의 입자는 거칠었다. 후덥한 바람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곧 방학이니 너무 들떠있지 말라는 묵직한 목소리와 그 뒤를 따르는 비슷한 대답들에 묻어가듯 입을 뻐끔거렸다. 충고와 조언이라는 값비싼 명목을 달고, 그 아래로 쏟아지는 지루하고 낡은 단어의 조합들이 어질러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차렷, 경례라는 소리를 들으며 반사적으로 흐느적거리는 몸을 애써 바로 하고서 힘 없이 고개를 숙였다.

 

 

 

  터벅거리며 올라가는 계단이 점점 뭉그러진다. 머릿속에 무거운 추가 원을 그리듯 바깥으로 회전한다. 위로 길게 늘어선 계단이 어그러지며 묵직하게 휘어진다. 손을 내두르며 어설프게 손잡이를 잡는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날 뻔했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비대한 욕구로 인하여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교실로 올라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안의 여린 살을 잘게 씹었다.

 

 

  체육시간이 끝난 후 곧바로 수학을 붙여놓은 이유는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라는 문장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작열하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기교와 기술 하나 없이 그저 무식한 체력전을 벌인 사람이 대부분인 탓에 교실은 정적이 흘렀다. 땀 냄새로 질식할 것 같은 좁은 공간에서 태반이 졸음에 쫓기거나, 아무런 저항 없이 잠식되어 이미 보이지 않는 장벽 너머로 제 몸을 맡긴 채였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교과서를 꺼내 책상 위로 펼친다. 페이지의 쪽수는 구태여 확인하지 않는다. 빼곡한 글자를 눈에 담는다. 책상에 난 자잘한 생채기들과 검은 글자들이 소용돌이치며 빙글거렸다. 귀퉁이에 적어놓은 수학 공식들이 제멋대로 위를 떠다닌다. 교란되는 수면에 의해 몸이 익사하듯 중력을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다. 꾸벅, 앞으로 쏠리는 무게로 고꾸라지는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든다. 언제 왔는지 모를 늙은 선생님의 오래되고 탁한 목소리는 공중을 부유하며 무색과 무취의 수면 기류를 서서히 퍼트린다. 발자국이 난 흰 벽을 타고 교실의 각진 모퉁이 가득 뿌리를 내린 수마의 촘촘한 덫에 나는 결국 항복하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린다. 그 깊은 구덩이에 몸을 담갔다.

 

 

 

  어둠이 깨어진 틈으로 빛이 밀려들어온다. 그로 인해 전해지는 일종의 이물감을 느끼며 눈을 뜬다. 밀려오는 물길의 울렁임과, 큰 파동으로 들려오는 파열음과, 그 뒤로 잔먼지처럼 가늘게 늘어 붙는 파도의 청량한 푸른 소리, 시야를 보드랍게 채우는 일몰의 옅은 호박색, 팔에 달라붙은 고운 모래들, 후덥하게 불어오는 뭉근한 바람과, 그 바람에 녹아있는 소금기 어린 짠 내들이 뒤섞여 메슥거리는 속을 한 번 더 할퀴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눈을 뜬 곳은 노을의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잘게 번쩍이는 모래사장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손바닥에 닿는 자잘한 모래들은 퍽 부드러웠다. 잔모래가 달라붙은 손을 이마에 올린다. 거칠거리는 살갗의 바닥을 느끼며 주변을 바라본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눈꺼풀을 닫았다. 다시금 모래더미 위로 몸을 뉘었다. 이 기묘함 속에서는 눈을 감을 수 있었으나 컴컴한 어둠으로는 도망갈 수 없었다.

 

 

 

  한참이라는 체감적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뜬 것은, 간질거리는 향이 코 끝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꽃잎을 짓이겨 진하게 압축해 놓은 듯한 향기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올렸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상체를 일으킨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금괴의 조각난 가루를 뒤집어쓴 모래사장 위가 아니었다. 발목을 덮는 흰 이불과 단정히 정리된 방을 둘러보며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와 액자 속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흰색으로 칠해진 배경에 붉은 꽃 몇 송이와 채 펼쳐지지 못한 꽃봉오리가 자리해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보편적인 나비 대신 검은색의 박쥐가 날카로운 가장자리의 날개를 넓게 펼쳐든 그림이었다. 술을 다 내보이며 활짝 젖혀진 붉은 꽃과 그 아래로 기다랗게 세워진 솜털 하나 없이 매끄러운 회청색 줄기에 현혹되듯, 그림을 한참이나 눈에 담고서야 정신이 맑아지는 비군을 느낄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주먹 크기의 테라리움은 주머니가 펼쳐진 형태의 유리 화병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둥그렇게 마무리된 화병의 가장자리가 창문으로 투과되는 빛을 받아 오묘한 빛을 발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발가락에 닿는 바닥의 온도는 기분 좋을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입고 있던 교복은 온데간데없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내려다본 바닥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깔끔했다. 흰색과 엷은 회색으로 칠해진 문을 마주한다.

 

 

  어느 쪽을 열어야 할까, 잠시 갈등한다. 고민하며 주변을 다시금 둘러본다. 회색은 찾아볼 수 없는 방 안을 보며 흰색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문틈으로 방대한 양의 빛이 쏟아진다. 갈피를 잃었던 바람이 몰아치듯 공기의 흐름이 빨라진다.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뭉근한 온기가 쏟아진다. 열린 공간으로 발을 내딛고 앞을 바라본다.

 

 

  "좋은 아침."

 

 

  심장이 떨어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올랐다. 때로는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이 지금처럼 딱 알맞게 떨어지기도 했다. 발밑으로 떨어진 심장이 퍼덕거리며 튀어 올랐다. 빛이 가라앉은 너머에는 먼지 한 톨 없이 잘 닦인 창문으로 투과되는 빛이 무지개를 띄우며 번져들어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알록한 색이 묻은 앞치마를 입고서, 평소보다 편안한 차림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뜻밖의 인물에 허둥거리는 정신으로 꾸벅 목례를 하며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맞아, 꿈이라는 명사는 이런 것이었지. 이런 현상을 의미했지. 가장 욕망하는 것을 투영했지. 나는 이제서야 긴장이 풀어져 보다 더 편한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앉아.”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방 한켠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제 맞은 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널찍한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놓인 것이었다.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는다.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 위에는 그림에서 본 듯한 붉은 꽃 한 송이가 꽂혀있다. 전보다는 나았으나 아직도 잔재하는 긴장으로 인하여 잘게 떨리는 양 손가락의 끝을 서로 맞붙였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는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서 두꺼운 스프링이 끼워진 공책과 연필을 손에 쥔다. 방 안을 빙 둘러보던 그가 공책의 위로 손을 움직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입을 여는 순간 간질거리는 심장의 끄트머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그 거친 움직임을 여실히 보여줄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서로의 지문을 녹이듯 천천히 비틀며 문지른다. 무의식에 덧그려진 허상이었으나 이것만으로도 감정의 색이 짙어진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말이 없었다. 계속 바라보는 행동은 실례인듯하여 흘긋 바라본 그는 꼿꼿하게 핀 허리와 내리깐 눈으로 그의 수업보다 더 진중한 빛을 띠우고 있었다.

 

 

  끝이 부드럽게 닳아진 연필의 소리가 공허를 잔잔하게 채운다. 꿈결이지만 갈증이 이는 착각이 들었다. 혀로 바싹마른 입술을 적시고 침을 삼킨다. 바쁘게 움직이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손을 바라보았다. 기울어진 각도 탓에 그가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비죽거리며 고개를 추켜든 호기심을 눌렀다. 여러 개의 책상과, 교복들을 사이에 두고 눈에 담았던 손은 언제나 길고 곧게 뻗어있었으며 그 끝이 단정했다. 꿈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시선이 짙었던 탓일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나와 시선을 얽는다.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호흡이 녹아내리듯, 깊은 눈에 잠식 당하는 기분이었다.

 

 

  “많이 봤어요.”

 

 

  내 말에 주어를 묻는 얼굴을 지어 보인다. 나는 책상 밑으로 검지와 중지를 교차시키거나 엄지를 나머지 손가락 사이에 넣는 둥 어수선하게 행동하며 대답했다.

 

 

  “산치오 라파엘로를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찾아봤어요.”

  “….”

  “비너스, 주노와 케레스, 삼미신, 시스티나 마돈나 같은 그림들이요. 말씀하신대로 정말 완전무결했어요.”

  “….”

  “그러니까. 선생님, 흥미가 생겼어요.”

 

  미술이요, 말끝을 흐리며 이제야 시선을 피했다. 구태여 그의 작품을 나열할 필요는 없었으나 허구의 그에게라도 조약한 어필을하기 위해 줄줄이 늘어놔본다. 감정을 1부터 10으로 쪼개어 본다면 그중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문장을 꺼냈다. 나의 조잘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흡족스러운 빛을 얼굴에 가득 비추며 연필을 고쳐잡고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허상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곧게 뻗은 속눈썹과, 귓바퀴의 모양까지 똑같았다. 정밀하고 세밀한 환영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현실에서는 아마 오랜 시간 동안 내뱉지 못할 말들을 채색된 그림자에 쏟아붓는다.

 

 

  “수업시간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다분히 건전한, 선생적인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이야기를 연장해 나갈 방법은 몇 가지가 없었으니 나는 감사하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히 입을 닫았다. 수업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은 욕심인지도 몰랐다. 나는 학교에서의 그만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것일지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관계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대화를 꿈꾸는 행동은 상상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현실로 돌아간다면 용기를 내어서라도 그와 몇 마디의 말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건방지게도 쉽게 허물어질 꿈속에서 만큼은 그를 건전히 생각할 마음이 없었다.

 

 

  “날이 더우니, 미술실 앞을 왔다갔다 거리는 것 보다 교실에 있는 편이 더 좋아.”

 

 

  덧붙여지는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전과 다름없는 진중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며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꿈이 맞는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런 세세한 일상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림을 다 그린 듯 연필을 내려놓는다. 다만 그 평평한 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공책의 앞면을 끌어와 그 위로 덮는다. 뚫린 구멍 사이사이로 끼워진 스프링이 긁히는 소리를 낸다. 필기체 휘갈겨진 영어가 공책의 앞면에 자리해있었다. 그 아래로 화병에 꽂힌 꽃 모양이 그려져있었다. 이 꿈의 한 자락에 물든 붉은 꽃을 보며 그에게 꽃의 이름을 묻는다. 한참 대답이 없던 그가 짧게 대답을 내뱉었으나 영어로 이루어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대답은 p로 시작했던것 같았으나 이 조차 꿈이 만들어낸 단순한 거짓이리라.

 

 

  "선생님."

 

 

  공책을 덮은 그가 내 부름에 답하지 않겠다는 듯, 화병의 꽃을 집어올린다. 마치 내가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 알고서 피하는 것 같았다. 기다랗게 뻗은 매끈한 줄기 아래로 물방울이 맺힌다. 잘 닦인 책상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고개를 숙여 꽃에 얼굴을 묻듯 한참이나 숨을 들이쉬었다. 선생님, 내 두 번째 부름에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곳곳에 닿을 때마다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상의 끝자락에 문질렀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아."

  "...."

  "그 말은 여기서 하지 않는 게 좋겠군."

  "여기에서 조차 제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까?"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탈을 뒤집어 쓴 허상이 꽃잎을 메만지며 말한다. 붉은 잎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낮은 폭으로 움직였다. 울컥. 어딘가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꿈속에서의 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꿈 속의 내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

  "모르는 척 하는 것 뿐이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붉은 색의 공책 위에 꽃을 올려 놓고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그는 허상이 맞는 걸까? 그 전에, 지나치게 현실적 감각이 느껴지는 이곳은 꿈속이 맞나?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네?”

  “그림을 다 그렸으니까.”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팔을 뻗어와 뺨을 쓰다듬는다. 큼직한 손바닥의 온기가 살갗을 적시듯 밀려들어왔다. 나는 잠시 이것이 현실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뺨을 만지던 손으로 눈을 가린다. 빛이 바싹 마르고, 팽만한 어둠이 찾아온다.

 

 

 

  온기가 사라지고 눈을 떴다. 또다시 해 질 녘의 모래사장 위였다. 발바닥을 모래밭 위에 붙이고 가만히 서서 바닷가의 바람을 맞는다. 이것조차 선명한 꿈인가. 꿈에서 후각과 촉각 같은 세밀하고 정교한 감각들을 느낄 수 있었던가. 복잡한 생각이 얽힌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린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뺨을 쓰다듬듯, 따뜻한 바람이 전신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다. 파도 소리를 몇 번 더 듣고 나서야 감았던 눈을 뜬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꿀을 바른 듯 샛노랗게 젖어있는 달이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움직인다. 철썩이는 파도가 발치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애석하게도 하늘은 달이 떠있을 뿐, 별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이 텅 비어있다. 눈을 감는다. 또다시 암전이었다.

 

 

 

 

*

 

 

 

  “켄지로. 일어나."

 

 

  새카만 어둠을 가르고, 잔주름처럼 얇게 엇나간 틈 사이사이에 빛이 새어들어온다. 나는 어깨를 움칠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녹진한 피로는 온데간데없고 내 앞에는 카와니시 타이치가 가방을 들고서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책상과 걸상, 녹색의 칠판과, 빛이 담뿍 쏟아지는 투명한 창문. 그 너머로 보이는 교정. 모든 수업이 끝난 듯, 텅 비어있는 여러 개의 자리들과 우리가 입고 있는 교복까지. 현실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내리쳤다. 손바닥과 뺨에 잔상처럼 남는 얼얼한 감각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타이치는 내 무모하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그대로 굳어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꿈이었나. 꿈이었던가. 그토록 생생하던 모든 감각들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방금 전에 보았던 것은 허상이던가. 뺨에 닿았던 바람의 감촉이 아직 선명하다. 내 머리카락의 가닥 가닥을 훑고,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향기를 싣고 왔던 그 바람은 붉었던가, 혹은 푸르렀던가. 어쩌면 두 색이 뒤섞여 또 다른 색을 만들어 냈을지도.

 

 

  분명하지 않은 기억은 그 깊이를 파고들수록 왜곡된다. 수면이란 그랬다. 무의식의 어딘가를 가르고 가만히 잠들어있던 기억을 꺼내와 물기를 짜내듯 몸을 비틀어올린다. 잠에 들지 않을 동안 보았던 면면의 빼곡한 검고 굵은 글자들로부터 형성된 불투명한 이미지와, 건반과 현으로부터 쌓아진 추상적인 실루엣들이 실을 뿜듯 가늘게 저미며 분해되고 또 그 안에서 켜켜이 쌓여 재조립된다. 침몰과 부상을 반복한다. 그렇게 틀어진 기억은 휘어진 나선을 촘촘하게 옭아그리며 꽉 쥐어진 채로 의식에 멀건 물방울을 떨어트린다. 물에 물감을 풀어 휘젓듯 탁하게 섞이고 재창조된 색으로 서로를 물들인다. 몽중에서 시간이라는 장벽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짧은 것은 보다 길어지기도, 긴 것은 더 길어지기도 하며 아지랑이를 피워 벽을 바르듯 움직인다. 그렇게 뒤섞인 기억들은 조용히 무의식과 의식의 검고 흰 틈 사이를 마구잡이로 종단하고 횡단하며 사선을 그리고 뒤틀며 단단히 쌓아올려진 기둥과 지붕을 이룬다. 그곳은 시간을, 언어를, 그리고 공간을 초월한 다른 세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성큼 다가온 파도에 한순간 쉽게 쓸려가버릴, 위태로운 황금빛의 모래성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가방을 잡아챘다. 타이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벗어났다. 뒤에서 타이치가 쫓아오듯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성큼 거리며 뛰어내려간다. 나를 따라잡은 타이치는 평소보다 가쁜 숨을 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지 않았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만나야 한다고 이성이 바닥 저 깊은 곳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걸음을 재촉한다. 그가 있을 미술실로 향한다. 걸음은 뜀박질로 변하고, 걸음의 박자에 맞추듯 심장의 고동이 더욱 거세진다. 미술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곳의 문을 연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제 책상 옆에 놓인 화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듯, 의자에 앉아 붓을 들고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손바닥에는 황금빛의 모래 대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증명하는 가방끈이 쥐어져있다. 처음 내가 눈을 뜬 후, 그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게 손바닥에 깊은 자국이 남듯 말아 쥔 손에 힘을 준다.

 

 

  "할 말이라도?"

 

 

  나는 그의 말에 잠시 시선을 피하며 단정히 정리된 책상 위로 고개를 돌린다. 펼쳐진 책 한켠에 희뿌연 우윳빛 구름을 타고서 내려오는 여신의 형상과 그 발치 아래로 잠들어 있는 남성의 신체가 보인다. 여성의 신체는 또다시 남성의 밋밋한 가슴과 보다 직선적이게 변한다. 나는 그 그림을 알고 있었다. 아담과 이브를 보았을 때처럼, 그들의 얼굴에 나와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얼굴이 덧씌워진다. 나는 그 그림에 시선을 빼앗기듯 넋이 나가있다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이 허벅지 옆에서 삐걱거린다.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눈에 담는다. 

 

 

  "좋아해요."

 

 

  그의 말간 눈동자가 긴장 서린 의문을 품고 있다. 내게 묻고 있다. 무엇을? 불과 몇 분 전에 꾸었던 꿈속의 그와 오버랩 되자 가슴께에서 이상한 감정이 뭉글거렸다.

 

  "르네상스."

 

  좋아해요, 내 대답에 그는 긴장 풀린 얼굴로 웃었다. 얼룩덜룩한 앞치마 한구석에 여전히 꽃과 박쥐가 선명하게 자리해있다. 그는 들뜬 얼굴이었다. 그의 단정한 입술 끝이 곡선을 그리며 얼굴에 보기 좋은 웃음이 번진다.

 

 

  "나도 좋아해."

  "알고있어요."

 

 

  나는 떨리는 입술 중 아래의 도톰한 살을 안쪽으로 끌어들어 잘게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내세워 그 뒤로 몸을 숨기고 비겁하게 고백한다.

 

 

  "저도 정말로 좋아해요."

 

 

  파도에 무너져 내릴 모래성일지언정, 잠시라도 온건하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한자락의 꿈에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의식은 모든 게 꿈이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이 현실인지 혹은 비현실인지 상관이 없을 뿐이었다. 간절히 보고 싶은 것이라면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의식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 주고는 했으니 지난밤의 꿈은 내가 그를 깊게 좋아한다는 일련의 증거인 셈이었다. 그 후로 카와니시와 교정을 거닐며 미술실 안의 그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수업 시간이 아니더라도 그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새카만 천장을 바라본다. 어둠이라는 도화지 위에 가닥으로 휘어지는 선과 공간을 매끄럽게 채워가는 색, 그 위로 덧칠해지는 음영의 완성형을 눈에 담는다. 그 속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얼굴을 완벽한 선과 색의 조화로 그려낼 수 있었다. 나는 입가에 그렁거리는 웃음을 숨길 생각도 못한 채 작게 웃었다. 닉스, 에레보스, 판타소스, 포베토르와 모르페우스. 신들의 이름을 나열해본다. 책에서 읽었던 그들이 한 번 더 내 컴컴한 꿈을 완벽한 허상으로 덧칠해주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입속에 넣었던 초콜릿 처럼 달콤한 정전이었다.

 

 

-fin.    

​여전히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의 부족한 연성과는 다르게, 여러 존잘님들의 완벽한 금연성들이 뒤로 더 많이 남아있으니 부디 즐겁게 읽으시고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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