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USSR

제목 없음
Vender
이것이 꿈이라 자각하는 순간, 허상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텅 빈 공간에서 맞이하는 공허한 아침. 자신을 채워줄 무언가를 위해 백야에서 깨어난다. 아침도 없고, 밤도 없고, 시간이 없는 곳에서 저는 무엇이라도 부르짖는다. 별이라도, 사람이라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어. 자신을 그렇게 명명했다.
언제부터 몇 차원인지 모를 이 공간에 갇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어나면 언제나 같은 배경이 저를 맞이하고 있다. 사람만이 빠져나간 지구의 끄트머리에 자신이 달랑거리며 위태롭게 서있다. 놓지 말아달라고 외쳐보지만 들을 사람이 없다. 외침은 우주에 흘러다니는 CD가 되어 언젠가 전해질 것이다. 제가 살아있으면 절 구해주세요.
역시나 들을 사람이 없다. 혼자 상상해 보기도 했다. 사람이 있는 세상. 흔히 외치는 신이라는 존재. 아마도 몇 천 년전쯤의 사람들이 소박하게 웃으며 말했던 일상이라는 단어. 지금은 모두 쓸모가 없다. 쓸데가 없다. 혼자라서 쓸 수가 없다. 적막하고 고요한 이 우주와 지구에서 존재하는 단어는 나. 하나 뿐이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아 제 이름이 시라부 켄지로가 되었다. 처음 태어났을 때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이름도, 성별도, 가족도. 자신의 근원도 모르는 채로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시라부는 스스로 말을 하는 법을, 밥을 차려 먹는 법을, 옷을 입는 법을 터득했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이 시공간에 던져진 하나의 사물이 되었을 뿐이었다. 가끔씩 모르는 언어들이 나오면 제가 살고 있는 집의 시스템에 입력하면 되었다. 감정없는 기계음이 단어의 뜻을 알려주고, 시라부는 그 뜻을 수첩이라는 곳에 펜이라는 것으로 적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았다. 이 도시를 아마도 미야기라고 불렀다. 그래서 자신은 미야기라는 시공간에 살고 있다. 이름은 시라부 켄지로. 언제 태어났는지 불명. 나이는 20. 자주 듣는 노래는 Scarlet sky.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나 들어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그나마 자주 듣는 노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 희미하게 떠올리는 넌 살아있어.
좋아하는 음식 시라스.를 끝으로 수첩에 적힌 것은 얼마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록들을 누군가 발견해주길 바라며 하루에 하나씩은 늘 적어내려갔다. 한 장, 두 장씩 넘어가는 것이 어느새 몇 권으로 불어났고, 펜도 슬슬 다 떨어지게 되었다. 언제나 불이 꺼져 있어야 할 가게들의 조명이 모두 켜져 있었다. 시스템이 오작동했나.
자신이 좋아하는 구두를 신어 또각또각 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밝은 조명이 구두를 빛내었지만 시라부의 눈가 근처까지 닿지는 못하였다. 펜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문이 닫히지 않았다. 자동문인데, 이상하다. 의문을 접어두고 문구코너로 향해 늘 쓰는 시그노 펜을 집어 들었다. 펜촉이 얇아서 최근 자주 쓰고 있는 펜이었다. 나도 참 아날로그적이지. 시라부는 펜 몇 개를 집어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시라부가 걷는 구둣소리에 맞춰 불이 점차 하나씩 꺼져갔다. 불이 왜 꺼져? 시라부가 멈추면 불은 꺼지지 않았다. 뒤로 걸어보면 걷는 걸음만큼 불이 또 켜졌다. 이걸 시스템이 하는거라고 하기엔, 몸에 소름이 돋아서 누가 했다고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지구에 남은 사람은 오직 저 하나다. 그 믿음을 깨버리는 누군가가 대체 제게 무슨 신호를 보내려 이런 짓을.
당신은 누구입니까, 외계에서 왔습니까? 나를 아십니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물음이 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닿았으면 했다. 불은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다. 두 번. 보통 고개를 끄덕일때 2번 끄덕인다. 긍정의 표시를 보낼 때도 좋아, 그래의 두 음절. 나를 알아? 그럼 질문을 바꾸어 물어보아야 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1층, 2층.
불이 한 번 깜빡였다. 1층이구나. 시라부는 들고있던 펜을 내려두고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찾아 걸음을 바삐했다. 생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감각이 새로워서 자꾸만 손이 후들거렸다. 혹여나 제가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여기가 가상현실인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그러기엔 온 몸에 돋는 소름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로 다가왔다.
문구코너를 다 돌았을 때쯤, 차례차례 꺼지던 불이 하나가 남아 한 곳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 쪽입니까.
시라부는 온 몸으로 뛰는 심장의 뜀박질을 느끼며 최대한 천천히 다가갔다. 혹여나 심장이 먼저 멈춰버릴까봐서.
그러자 저보다 키가 훨씬 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면 안되는 사람을 본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수 많은 날 중 하필 오늘이 되어야 했던 것인가. 놀란 마음에 미지의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 독이 되었는지 헛기침이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남자는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시라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저가 뒷걸음질 치는 덕에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멈추지 않던 기침을 겨우 잠재우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았다. 키는 대략 190. 턱이 날렵하고 눈매가 사납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 보기 좋은 몸. 언젠가 체육이라는 과목을 정리해놓은 책에서 읽었던 몸의 묘사를 기억해냈다.
이상적인 사람의 형태다. 그럼 사람이 아닌 건가. 몇 천 년만에 마주친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이름이 무엇입니까.
...
저는 시라부 켄지로에요. 20살. 성별은 모릅니다.
...
말을 할 줄 모르십니까.
...우시지마 와카토시. 28. 성별은 남자. 시라부 켄지로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음. 내 머리가 너를 찾으라고 시켰다.
머리가 찾으라고 시켜? 반문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 게 어딨어. 마음이 시키는거지.
시라부는 갑작스레 증폭된 의문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 앞에 멀뚱히 서있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머릿속에 가득한 물음표들을 지우는 것도 모두 어려웠다. 갑작스레 제가 세워온 세계가 발길질 한번으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저 사람 뭐지. 첫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저에게 말을 걸려는 듯 싶었지만 이내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시라부도 가만히 서있었다.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정적이 서로를 에워쌌다. 그렇게 꿈쩍이지도 않기를 몇 분. 손가락을 괴롭히던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원래 말이 없는 걸 좋아하는가?
... 아닌데요. 그쪽이야 말로. 어디서 뭘 어떻게 제 정보를 듣고...
말했지 않는가. 머리가 시켰다고.
원래부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눈치가 없는 건가. 시라부는 팔짱을 끼고 괜히 남자를 노려보았다.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더욱이 호의를 품고 있는 쪽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감정이 메마른 사람인가. 무언가 더 물어보기엔 딱히 건넬 말이 없었다. 여기서 헤어져야하나. 그러기엔 궁금한게 수 백, 수 천가지인데. 저, 저기. 말이 겹쳤다. 먼저 하라는 손짓을 보내자 남자가 자신은 저 앞에 산다며 자주 놀러오라고, 혹시 자신이 궁금한거라면 언제든 물어와도 된다며 이야기했다. 말이 없는 동안 저 두마디를 생각해낸건지 준비한 마냥 말이 막힘없이 터져나왔다. 아, 네. 그럴게요. 생각보다 대답이 시큰둥하게 나갔지만 다시 고쳐말할 생각은 없었다. 뭐, 제가 사는 곳도 아시는 것 같으니 이따 저녁이나 함께 하죠. 생각보다 제안이 흘려가는 말처럼 나갔지만 역시나 고쳐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사람의 축에 속해서였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기어코 제 집을 찾아왔다.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초인종의 소리가 귓가의 언저리에 명확하게 들렸다. 음이 10개 반복되는구나.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누구십니까,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일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정도는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맞이한다는 새로운 감정. 반갑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모든게 서투르지만 터득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시지마다. 그의 목소리가 일정한 음으로 이어졌다.
현관에 있는 터치시스템을 이용해 문을 열었다. 남자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여기가 너가 사는 곳인가. 우시지마는 온통 새하얀 집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주인을 똑 닮은 것 같았다. 정갈한 머리도 그렇고, 말투도. 하얀 소파위에 앉은 자신이 오히려 더럽게 느껴질 정도로 깨끗해보였다. 시라부는 앞치마를 두르려던 중이었다. 이것 좀 도와주실래요. 우시지마가 곧 다가가 헤매고 있던 손을 잡아 리본을 묶는 법을 알려주었다. 겹쳐지는 손에 감각이 이상했다. 누군가와 살결이 닿을 때 생겨나는 감정. 생소했다. 자신은 이것은 무엇이라 부르는지 잘 모르겠다. 그와 있으면 새로운 감정들을 많이 배우게 된다. 그가 움직이는대로 제 손이 따라 움직였다. 동그랗게 말은 두 끈을 교차시켜 생긴 공간에 넣어 리본을 만들었다. 리본, 묶어본 적 없는건가. 할 일이 없는데요. 그럼 앞치마는 왜, 굳이 물어보셔야 하겠어요? 요리할 거 잖아요. 잡힌 손을 풀고 시라부는 서랍장을 열어 먼지가 가득한 프라이팬을 꺼냈다. 사실 부엌엔 잘 들어오지 않는 터라 가득 쌓여있는 조리기구들을 쓸 일이 없었다. 아직 가지 않았는지 우시지마는 요리를 잘 안하는 군. 하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미끼를 덥썩 문 시라부는 할 일이 없으니까 안 하죠! 괜히 언성을 높였다. 갑자기 생긴 정적에 흠, 목을 다듬는 척 이상해진 분위기를 무마하려 노력했다.
엉성하게 볶아진 채소에 밥 몇 덩이를 함께 볶아만들었다. 수많은 양념 중 무엇을 넣을지 몰라 고민하니 보다못한 우시지마가 이거. 하며 손에 쥐어주었다. 제가, 알아서 가져가요! 자꾸만 그에 의해, 그로 인해 손이라던지 양념소스가 담긴 병같은 것이 제 손 끝, 손에 닿으니 기분이 이상해서 말이 엇나갔다.
손에 잡힌 양념병을 아무렇게나 흔들었다. 간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또 우시지마가 나서서 대책없이 흔들어지는 양념병을 가로챘다. 또 손, 손 닿았어. 기분이 자꾸 이상했다. 대체 요리라는 걸 알긴 아는건가. 우시지마는 곧 주위에 있던 갖가지의 양념을 뿌리더니 곧 불을 껐다. 기분 좋은 냄새가 나서 킁킁거리니 그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건데요! ... 또 말이 엇나가서 저가 주책맞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던 식탁에 식탁보를 깔아두고 그 위에 엉성한 요리 1, 이상할 뻔 했던 요리 2,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요리 3이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맞나요?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 물어보았다. 사실은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던 말이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했다.
당신은 친절해. 몇 시간동안 함께 있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 맛있었어요? "
" 아니. "
단칼에 제 기대가 담긴 물음을 베어버리는 답이었다. 친절하다는 말 취소. 시라부는 괜히 뾰루퉁해져서 우시지마와 함께 앉은 소파에서 굳이 등을 돌려앉았다. 우시지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말이 없는 사람같았다. 필요할 때만 말을 하는 사람. 그러다 자신이 모르는 우시지마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져 자세를 바꾸어 우시지마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 당신, 우시지마 씨는 어디서 왔어요? "
" 나도 모른다. 태어나보니 나는 이 행성에 떨어져있었고, 아침 6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몸이 일어나도록 시켰다. 그리고 하루종일 내가 아닌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너를 발견했어. 고립되고 고독한 이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가슴이 떨리는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네게 신호를 보낸거다. 다행히도 알아차리더군. 스스로를 늘 바쁘게 만들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설정되어있었어. "
" 그 쪽 혹시 로봇? "
" 미안하게도 사람이군. "
스스로 제 일과를 불어대는 우시지마를 보고 있자니 왠지 제 입도 근질거려왔다. 우시지마의 말이 끝나고 시라부는 제 방으로 가 수첩과 펜을 가져와 우시지마에게 전했다.
" 이건 제가 매일 쓰고 있는 노트랑 펜. 이름은 마지막으로 살았다던 사람의 이름을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원래는 이름 없음. 성별은, 그 쪽이 남자라고 했으니까 나도 남자할래요. 남자 말고 성별이 또 있는건가요? 책에는 안나와있던데. 어쨌든간에 저는 제가 아닌 누군가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잖아요, 모든게 허상인 세계에서 실재하는 건 나 하나라고 그렇게 믿어왔는데. 그쵸? "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우시지마를 쳐다보았지만 우시지마는 말이 없었다. ...아까 말한게 하루치 언어인가. 우리 다 가짜에요? 그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가 대답하지 않을수록 시라부의 물음은 자꾸 늘어갔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이게 독백입니까, 대화입니까. 우시지마에게 고개를 가까이하며 눈을 부라리자 우시지마가 눈을 감았다. 볼을 톡톡 건드리니 우시지마는 다시 눈을 떴다.
뭐하세요?
생각 중. 한 꺼번에 물어오면 바로 대답 못해준다.
그래서 시라부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대답은 듣고 싶은데, 말이 없으니 기분이 고요했다. 딱히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더 닦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 깜빡이기를 몇 백번. 이름을 붙인 접시가 가만히 앉아있던 시간 10분. 다리를 떨기를 30번. 그럼에도 우시지마의 눈은 떠질 기미가 안보였다. 그러나 곧 천천히 눈을 떴다. 우시지마의 얼굴 생김새를 보고 있던 시라부가 신난듯이 이제 대답해줘요! 하고 말하자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세계에서 실재하는 건 이 모든 세계라고 생각한다.
우린 가짜가 아니지, 그래서 나는, 너는 살아있어.
그리고 우시지마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다에요? 이 느림보야!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로 달려들어 어깨를 팡팡 때리자 우시지마는 저를 때리던 시라부의 손목을 잡아 제 손에 가두었다. 근데, 우리가 살아있는게 맞아요? 중력에 의해 둥둥 떠있는 머리칼이 우시지마의 콧대를 간지럽혔다.
그렇지, 살아있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맞닿을수도 있는거고.
뭘, 뭘 맞닿아요!
하여튼간에, 아직 어려서야.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일으켜세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공허하다. 그리고 우시지마는 밖으로 나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따라나온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시선을 따라 제 위의 공간에 펼쳐진 은하수를 보며 말했다.
아마도 저기 모두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리 말고, 모든 게. 아, 그거 아세요? 오늘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사랑이라는 걸 하면 행복해진대요. 우시지마 상도 알고 있으셨어요?
그럼, 모를 리가 없다. 끝없는 사랑의 연속이 인생이 아니겠나.
당신도 사랑을 해봤어요?
응, 너는 해본 적이 없는 가 보군.
만난 사람이 없는 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혼자 하는 사랑도 있다고는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왕이면, 혼자하는 사랑보단 함께하는 사랑이 나을거다.
함께하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거에요?
이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반사된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동그랗게 더 띄여진 눈에 우시지마의 얼굴이 담겼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입과 입이 맞닿았다. 은하수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자신을 더 끌어당기는 손이 나쁘지 않았다. 이게, 키스인가? 우시지마가 더 파고들수록 시라부는 눈을 더 크게 떴다. 입술의 감촉이 말랑말랑했다. 책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신기하고 생소한 감각이었다. 우시지마가 눈을 천천히 뜨자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게, 함께 하는 사랑의 처음. 한 번 더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엔 시라부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롯이 움직이는 입술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창 더운 숨을 섞는 중에, 우시지마의 살덩이가 시라부의 아랫입술을 톡 하고 건드렸다. 놀란 시라부가 눈을 뜨자 그 잇새로 우시지마의 혀가 침범했다. 뱀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소름끼쳐 우시지마의 가슴팍을 밀쳤다.
하, 숨 막혀.
이게, 함께 하는 사랑의 두 번째.
이제 그만 해요. 힘들어.
한참 달궈진 분위기가 파란하늘에 의해 천천히 잠잠해져갔다. 여유로히 유영하는 백조처럼.
너는, 내가 이렇게 갑작스레 키스해도 아무렇지 않은건가?
처음엔 놀랐는데, 두 번째는 괜찮았어요. 함께 하는 사랑이 뭔지 알려주신거잖아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시라부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시지마는 자리에 멍하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하늘이 밝았다. 우시지마는 멈췄던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첫 사랑의 감정과 비슷했다. 어쩌자고 입술을 부딪혀버린건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시라부의 반짝이는 눈빛에 제가 이끌려갔다고 생각했다. 눈 안에 별이 가득히 박혀있어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시간이 나면 우시지마는 항상 시라부의 집에 들렸다. 로드워크를 한답시고 시라부의 집 앞에 우유를 놓고 간다던가, 무인無人빵집에서 뜨끈하게 온기를 품고 있는 바게트와 생크림 몇 개를 넣은 바구니를 놓고 간다던가. 한 번의 키스로 인해 얻은 감정이라기엔 의아한 마음이었다. 무언가, 시라부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 그 때도 그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마음이 이끄는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고독한 지구에서 자신은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쌍방엔 주체가 없다는걸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라부는 그 때의 입맞춤 이후로 항상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항상. 그를 떠올리면 자꾸만 한 밤의 키스가 떠올랐다. 이게 함께하는 사랑이야? 사실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도 잘 모르겠다. 내가 볼땐 혼자하는 사랑같은데. 아침마다 집 앞에 놓여져 있는 갖가지것들을 받을 때면 괜히 얼굴이 후끈했다. 점점 일어나는 시간도 이르게 되면서 창문 너머로 우시지마가 지나갈까 괜스레 훔쳐보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언뜻 보면 감정의 소모를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빠져나가는 만큼 채워지는 것도 사랑. 자꾸 생각의 실타래를 풀다보면 상상속의 우시지마는 벌써 두 팔 벌려 저를 반기고 있다. 이상해. 어색해. 부정적인 뜻을 담은 단어들만 내뱉어졌다.
우시지마는 생각없이 찾아와서는 준비해뒀던 말을 다다다 쏟아붓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나중에야 이야기한것이지만 제가 친하게 지내려는 방식이라고 했다.- 흘러넘치는 말들을 한꺼번에 담기엔 제 그릇이 너무 작았다. 생각해보면 별 뜻을 담고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잘 잤냐, 식사 꼭 챙겨먹어라, 펜 잉크는 다 떨어지지 않았냐, 저녁 같이 먹지 않겠냐 등의 여러 이야기를 하고는 제 대답을 듣고 가지도 않는다. 일방적인 말들이었다. 그럼 시라부가 우시지마의 집의 초인종을 마구잡이로 누른다. 우시지마는 애써 평온을 품고 시라부를 맞이한다.
잘 잤고 식사 꼭 챙겨먹고 있고 잉크는 아직 안 떨어졌고 저녁은 같이 먹어요. 복수야.
그리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시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닫힌 문에 우시지마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시간을 체크한다. 5시면 이른 저녁이다. 제 감정은 이미 한 밤을 넘어가서 문제였지만.
우시지마는 제일 좋아하는 페라리 블랙을 손목에 살짝 뿌렸다. 목 언저리에도 향이 남도록 가볍게 두드렸다. 시라부를 보고 있으면 보드라운 향이 피어난다.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이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하는 저녁은 더욱이 떨린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우시지마는 약간은 쌀쌀한 날씨에 두툼한 가디건을 챙겼다. 셔츠 하나로 나가기엔 약간 오한이 들었다.
혹여나 시라부 또한 얇게 입을까 어렸을 때 입던 가디건을 찾아내 함께 챙겼다.
집 앞에 도착할때 쯤에 이미 대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라부를 보았다. 오늘은 텐션이 낮은지 손을 작게 흔들어보였다. 우시지마는 예상대로 맨투맨 한 장뿐인 시라부를 보고 제가 들고 있던 가디건을 어깨에 걸쳐주었다. 회색 맨투맨과 검은 가디건이 함께 어울리니 옷차림이 썩 나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걸었다. 닿는 손길이 나쁘지 않아 시라부는 그대로 두었다.
암묵적인 동의인가, 싶으면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을 너무 멀리부터 시작한건지 걱정이다.
함께하는 사랑의 첫 번째, 두 번째를 모두 키스로 알려주는 덕분에 시라부는 여기서 더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이 되어 머리가 여리게 아파왔다. 분명 그가 좋은 것은 맞다. 하지만 자신은 서툴기 때문에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름? 나이? 그런 것은 진작에 알고 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까지 미치자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저 좋아하세요?
아, 아니.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응, 좋아해.
아, 뭐를 좋아하세요?
너를.
잠시 말이 없었다. 애매한 정적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아, 저도. 저도, 우시지마 상을 좋아하긴 하는데요. 말이 헛나온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주시고...
너를 좋아하냐며. 좋아한다니까.
자꾸 이유없이 손이 떨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 같이 속이 갑자기 메스꺼워졌다. 잠시만, 화장실 좀요. 입을 손으로 막으며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속이 정말로 메스꺼웠다. 울렁거리고, 긴장되고, 부끄러웠다.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거지. 엉망이 된 얼굴을 물로 대충 씻었다. 물방울이 군데군데 맺힌 얼굴이 창백해보였다. 티슈로 간단히 닦아 물기를 없애니 더욱 창백해보였다.
시라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미 음식은 세팅된 후였다. 아, 다 식었겠다. 적당히 말을 던져 고요한 분위기를 깨보려했지만 말이 없는 우시지마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괜히 미안해져 묵묵히 먹고 있는 우시지마의 근처에 손으로 똑똑, 하고 두드렸다. 그제서야 우시지마가 쳐다보자 시라부는 다시 고개를 쳐박았다. 역시, 못하겠어. 마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작게 말했다. 저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시지마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크림 소스가 입가에 묻어있었다. 포크가 바닥에 얹혀지며 챙그랑-하고 얇은 소리를 냈다. 시라부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올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우시지마가 보였다. 좋, 좋아하는 말 취소...
취소하지마. 두려워도 하지마. 네 감정에 더 솔직해져.
그러기 위해서 내가 온 거니까.
아? 시라부는 벙찐 채로 눈을 흐리멍텅하게 떴다. 시라부는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기에, 그의 말을 적용해서 이야기했다.
" 좋아해요, 좋아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제 감정에 솔직한 결과. 솔직히 그 입맞춤때문에 눈에 띄게 감정이 좋아진 것도 있는데요. 그런데, 본질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거였어요. "
" 그래, 너를 좋아해. 감정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너를 사랑해. 내가 애초에 온 이유는 그 이유야. 아마 네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살아있어라고 했지. 그게, 나다. 이 지구에서 홀로 살아온 댓가로 사랑을 얻었다.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 나는 달려온거야, 나보다 한참 어린 시라부 켄지로를 찾기 위해서. 사실, 나이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어찌보면 이걸 영생이라고 할 수도 있을거다. 사랑도 같아. 나는 영원한 사랑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위해 생겨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지. "
우시지마의 긴 말이 끝나자 시라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카키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제 품에 가두었다. 내가 왜 생겼는지 그 쪽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웅얼거리며 말하는 시라부가 퍽 귀여웠는지 우시지마는 묻었던 고개를 떼고 시라부를 올려다보았다. 날 사랑해?
그럼요, 사랑하죠.
먼저 우시시라 2월 호에도 참가하게 되어 너무너무 기쁩니다! 또한 제 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며 주최님께도 감사한 말씀 드립니다. 글을 쓰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 엎었던 게 생각나네요! 그래도 재밌게 썼습니다. 시라부의 행동들이 사랑에 대한 면역이 없어서 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행복하세요!